
바로크 미술은 서양 예술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흐름이다.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는 스페인의 ‘황금시대’가 있다. 막강한 왕권과 단단한 가톨릭 신앙, 신대륙에서 흘러든 부(富)를 바탕으로 헤게모니를 쥔 이베리아 반도에선 자연스럽게 예술이 꽃피웠다. 벨라스케스, 수르바란 같은 화가들은 특유의 문화적 혼종성을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독특한 회화로 풀어냈다.
하지만 국내에서 스페인 미술은 낯설다. 르네상스의 본산 이탈리아와 인상주의가 탄생한 프랑스의 미술은 굵직한 전시를 통해 수 차례 소개됐지만, 스페인 미술을 본격적으로 마주할 기회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엘 그레코, 프란시스코 고야 같은 거장의 작품이 제각기 걸리거나, 특정 시대가 단편적으로 조명된 적은 있어도 통시적인 맥락을 한자리에서 살펴보긴 어려웠다.
이런 미술사적 공백을 메울 전시가 한국에 상륙했다. 22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개막한 ‘스페인 미술 500년: 빛과 어둠의 연대기’다. 한국경제신문과 미국 뉴욕 히스패닉 소사이어티 박물관&도서관(HSML)이 한·스페인 수교 76주년을 기념해 공동 주최했다. 15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스페인 미술 500년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그림 95점을 선보인다.

‘지금 아니면 볼 수 없는(Now or Never)’으로 수식되는 특별한 전시들이 있다. 이번 전시가 그렇다. HSML은 스페인 밖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가치가 높은 컬렉션을 구축한 기관으로 꼽히지만, 이 방대한 소장품을 대규모로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전시는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2017년 스페인 프라도미술관이 HSML 컬렉션으로 연 전시에 48만 명이 몰려든 이유다. 당시 프라도는 “스페인을 포함해 세계 어느 곳에서도 단일 기관으로 이처럼 히스패닉 세계의 역사와 예술, 문화를 총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곳은 없다”고 평가했다.
전시를 기획한 오은수 선임큐레이터는 “HSML 컬렉션이 아시아에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미국 내에서도 미술관 밖에 HSML의 컬렉션이 전시되는 경우가 잘 없고, 이번 특별전 역시 서울에서만 열리는 단독 전시라는 점에서 특별하다”고 설명했다.
시대 흐름에 따라 6개 섹션으로 구성된 전시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화가들의 작품이 곳곳에 걸렸다. 엘 그레코의 ‘성가족’, 벨라스케스가 그린 ‘카밀로 아스탈리(팜필리 추기경)의 초상’, 고야의 전신 초상 ‘돈 마누엘 라페냐’ 등이 대표적이다. 이그나시오 술로아가, 호아킨 소로야 등의 작품도 볼 수 있다.
이날 찾은 전시에서 관람객들은 4부 ‘풍경과 외광회화’, 5부 ‘일상을 담은 풍속화’, 6부 ‘모더니즘 속 전통과 근대성의 조화’ 등 전시 후반부 섹션에 유독 오래 머물렀다. 짙은 적갈색 대지와 눈부시게 푸른 하늘 등 스페인의 풍광이 다른 유럽 지역의 풍경과 확연히 다른 인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호세 마리아 로페스 메스키다의 ‘아빌라의 신학생들’ 앞에 선 한 관람객은 “흔히 봤던 녹음이 우거진 풍경과 달라서 묘한 감정이 든다”고 했다.독특한 전시 디자인도 작품 못지 않게 현지의 정취를 살린다. 스페인 건축 양식을 빌려 섹션과 섹션 사이의 벽을 막는 대신 큼지막하게 뚫었다. 오 선임큐레이터는 “공간 너머 다른 시대의 작품까지 시야에 들어오게 구성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1월 20일까지 열린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관람 가능하다. 관람료는 성인 기준 2만3000원이다.
유승목/성수영 기자 mo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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