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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프리즘] 40년 전에 멈춘 공정위의 시계

입력 2026-10-06 17:46   수정 2026-10-07 01:03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유럽과 일본 기업의 위상이 추락하기 시작한 건 20~30년 전부터다. 소프트웨어 시대가 왔는데도 기업들은 디지털 전환을 머뭇거렸고, 정부는 제조업 중심 생태계 지키기에 급급했던 탓이다. 그 사이 미국은 빅테크를 앞세워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장악했고, ‘세계의 공장’이 된 중국은 유럽·일본으로부터 ‘제조업 왕국’ 타이틀을 넘겨받았다.

10여 년 전 열린 인공지능(AI) 시대는 이들을 코너로 몰아넣었다. 언어는 물론 시간·공간 경계도 허무는 AI의 특성에 따라 세계가 한 묶음으로 돌아가자 미·중에 비해 기술과 자본력 모두 밀리는 유럽·일본 기업이 설 땅은 점점 좁아졌다. 신중하다 못해 느려터진 이들 정부가 ‘성장의 단축키’인 인수합병(M&A) 심사 틀을 각각 20여 년 만에 뜯어고치기로 한 이유다.

포문을 연 건 유럽이다. 지난 4월 발표한 초안에는 M&A 심사의 핵심 잣대인 합병에 따른 소비자 피해뿐 아니라 규모의 경제가 낳을 혁신과 투자 확대 같은 시너지를 적극적으로 들여다보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몸집을 키워 글로벌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막대한 투자비를 적기에 조달하는 등 ‘합병의 미덕’에 과거보다 후한 점수를 주겠다는 얘기다. “미·중에 맞설 ‘유럽 챔피언’이 필요하다는 요구에 대한 응답”이란 현지 보도가 나온 배경이다.

일본도 뒤따랐다. 7월 M&A 심사지침 개정안을 내놓으면서 “M&A로 기술 혁신과 공급망 안정성이 좋아지면 경쟁 촉진 효과로 인정한다”고 못 박았다. 경쟁의 무대를 인구 감소로 쪼그라드는 내수 시장에서 세계 시장으로 확장하고, 합병 효과를 판단하는 시간 축도 ‘지금’에서 ‘미래’로 길게 잡기로 했다. 합병 직후 높아진 시장점유율뿐 아니라 M&A가 미래의 혁신과 경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살펴보겠다는 의미다.

미·중 패권전쟁의 틈바구니에 낀 건 한국도 매한가지다. 하지만 우리 공정거래위원회는 미·중에 맞설 챔피언을 키우려는 유럽·일본과 달리 기업이 커지면 채찍부터 든다. 자산총액이 5조원을 넘는 순간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 지정해 온갖 규제를 얹는다. 정부와 기업이 원팀이 돼 ‘국가대항전’을 치르는 시대에도 공정위의 시계는 대기업집단 규제를 도입한 1986년에 멈춰 있다.

공정위가 올 하반기 역점 과제로 ‘대기업집단 경제력 집중 완화’와 ‘경제주체 간 힘의 불균형 완화’를 꼽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대기업과 납품 가격·물량 등을 협의할 때 중소기업이 공동행동을 해도 담합으로 안 본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피 튀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업이 혁신해야 할 이유를 경쟁적 시장 환경 조성이 설립 목적인 ‘경쟁주창자’가 스스로 내던진 셈이다. 담합이 경쟁 압력을 떨어뜨려 ‘좀비기업’ 퇴출을 늦추고, 담합으로 오른 납품가가 소비자가격에 반영될 수 있는데도 말이다.

반면 대기업에 대해선 “바람직한 소유·지배·행태 기준을 공정위가 제시하고 계량적인 측정 지표도 개발하겠다”고 했다. 기업에 자율과 창의성을 안기기 위해 규제를 걷어내는 글로벌 트렌드와는 정반대 행보다. M&A 심사도 그렇다. 챔피언 기업을 키우기 위해 경쟁 촉진의 범위를 넓혀주기는커녕 “핵심 인력을 대거 흡수하는 편법적 M&A도 들여다보겠다”는 내용뿐이다. ‘부실기업 정리용 M&A’가 아니라 ‘대형 자발적 M&A’를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유다.

공정위의 임무가 대기업을 눌러 중소기업과 키를 맞춰주는 ‘체급 조절관’일 리 없다. 우리 기업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얻은 강한 체력으로 세계 무대에 도전하도록 돕는 ‘공정한 심판’이어야 한다. 공정위가 보호해야 할 것은 약한 경쟁자가 아니라 경쟁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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