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지난 6일 화려한 막을 올린 가운데, 개막식 무대부터 영화계 안팎의 가장 뜨거운 화두인 인공지능(AI) 이슈가 소환됐다. 31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아시아 최대 영화제라는 명성에 걸맞게, 올해 개막식은 톱스타들의 레드카펫 등장부터 생성형 AI로 제작된 배경음악을 과감하게 도입해 이목을 끌었다.
배우의 이름과 출연작, 작품 속 내용이 담긴 독특한 BGM이 레드카펫에 울려 퍼지자 현장은 순식간에 술렁였다. 영화 '정가네' 팀의 류승룡, 박해준, 옹성우 등은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즉석에서 재치 있는 어깨춤을 추며 유쾌한 분위기를 더했고, '메이드인코리아2' 팀과 개막작 '낮과 밤은 서로에게' 팀 역시 근엄한 차림새와 달리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판빙빙, 양자경 등 중화권 톱스타들이 등장할 때는 이른바 '중티'(중국 느낌)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 같은 파격적인 시도 뒤에는 엇갈린 평가가 잇따랐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상에서는 "AI로 만든 티가 너무 난다", "밤티(촌스럽다)가 난다",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솔직한 반응이 이어졌다.
이번 개막식 총연출을 맡은 민규동 감독이 직접 가사를 쓰고 생성형 AI를 활용해 곡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을 대표하는, 유서 깊은 영화제의 거창한 오프닝 무대에서 AI 기술을 과감하게 차용했다는 점에서, 영화계가 마주한 기술적 전환의 파고를 단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이러한 화두는 개막식의 해프닝에 그치지 않고, 토론을 통해 공론화가 이어졌다. 지난 8일 부산 해운대구 영상산업센터 컨퍼런스홀에서 개최된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전문 학술행사 '2026 포럼 비프(Forum BIFF)'에서는 'AI 이후의 시네마: 영화는 누가 만드는가'를 주제로 급변하는 제작 환경과 영화 매체의 본질을 다루는 심도 있는 논의가 펼쳐졌다.
생성형 AI는 이미 시나리오 구상, 시각 효과, 후반작업에 이르기까지 제작 공정의 여러 단계에서 실무 도구로 깊숙이 자리 잡았다. 2023년 할리우드 작가·배우 노조의 파업 당시 AI 활용 규제가 핵심 쟁점으로 다뤄진 것은 이 기술이 창작 노동의 문제로 공식화된 첫 장면이었다. 이후 주요 영화상과 영화제가 AI 활용에 관한 기준을 차례로 마련하면서 논의는 규범의 영역으로 옮겨갔다.
기술의 도입 여부를 묻던 시기는 지나가고, 그 기술을 통해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가를 묻는 시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 전환이 이전의 기술 변화들과 구별되는 지점은, 생성형 AI가 표현의 수단을 확장하는 것을 넘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과정과 그 주체의 문제에까지 닿아 있으며, 그에 따라 영화를 이루어온 개념들이 하나씩 다시 물음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오랜 시간 정교하게 다듬어져온 연출과 제작의 방법론은 생성형 도구 앞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무엇으로 대체되는가에 대한 실존적 질문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 영화제를 찾은 중화권 톱스타 판빙빙 역시 기자회견을 통해 최근 폭발적으로 확산하고 있는 AI 숏폼 콘텐츠와 관련해 소신을 드러냈다. 중국 현지에서 AI 기술을 활용한 숏폼 드라마가 급증하며 배우 초상권 침해 논란 등이 불거지는 상황에 대해, 그는 기술이 다양한 방면에서 사용되는 진행형이라면서도 한계가 있다고 짚었다.
판빙빙은 "현재 쏟아지는 AI 숏폼 드라마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스타일만 다를 뿐 등장인물의 얼굴과 형태가 너무 비슷해 어떤 작품을 보든 배우의 얼굴을 기억하기 어렵다"라며 "구체적으로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청년들이 과연 다양한 장편영화를 접하며 예술적 심미안을 키우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라고 우려를 표했다.
이어 "일부 감독이 예산 감축을 목적으로 AI를 도입하고 있으나, 사람이 직접 연기할 때 뿜어져 나오는 미묘한 감정선, 삶의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노련함과 스킬은 AI가 결론적으로 대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중국의 거장 지아장커 감독은 올해 초 자신의 분신 같은 AI 생성 인물 두 명이 화면 속에서 서로 묻고 답하는 단편 작품을 만들었던 경험을 전했다. 지아장커 감독은 "저를 닮은 이미지가 제 영화 속 장면들을 오가는 모습은 기묘한 시간여행 같은 감각을 안겨줬고, 그 감각 끝에서 창작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필름에서 디지털로 넘어오던 시기에 그러했던 것처럼, 생성형 AI 역시 창작자에게 새로운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면서 "중요한 것은 이 기술을 어떻게 자신의 시선과 태도 안으로 끌어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이며, 그 답을 저 역시 AI와 마찬가지로 아직 배워가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프롬프트와 알고리즘이 창작의 공정 깊숙이 파고든 현 시점에서, '창조성'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하고 교육과 미디어 환경 속 인간의 역할을 짚어보기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최원호 동서대 교수의 사회로 문을 연 이번 세션은 각기 다른 문화적 배경과 현장 경험을 지닌 연사들의 생생한 발표로 채워졌다.
핀란드 투르크대학교의 야코 수오미넨 디지털문화 교수는 '레트로스코프, 혹은 오래된 미디어 형식으로의 회귀'라는 발제를 통해, 미디어사와 정보기술의 문화사적 맥락 속에서 오늘날의 기술 변화를 조망했다. 그는 새로운 기술의 도래가 과거의 미디어 형식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역사 문화적 시각에서 바라봤다.
중국의 저명한 다큐멘터리 감독 런창전은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대화'를 주제로 현장감 있는 목소리를 냈다. 그는 일상의 결을 살려 동시대 중국의 사회 변화를 밀도 있게 담아온 다큐멘터리 연출 경험을 바탕으로, 알고리즘이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소통 방식과 삶의 진정성이 가진 힘을 강조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개막식의 AI 음악 해프닝부터 학술 포럼에 이르기까지, 영화와 기술의 충돌 지점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상상력을 압도하는 시대, AI는 이미 영화 제작의 거스를 수 없는 파도다. 하지만 관객을 매료시키는 것은 단순한 알고리즘의 산물이 아니라, 스크린 너머 인간이 치열하게 살아낸 삶의 고뇌와 감정의 결이라는 것이 영화계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영화제에 참석한 한 관계자는 "지금 우리는 기술이 단순히 이미지를 찍어내는 것을 넘어 스스로 생성해 내는 거대한 전환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며 "이제 인간의 창조성은 단순히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능력'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AI가 던지는 결과물 앞에서 올바른 질문을 던지고 의미를 주체적으로 구성하는 행위로 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AI와 예술이 공존하기 위해 영화계가 던지는 이 거대한 질문의 답은, 결국 기술을 도구 삼아 인간의 자리를 더욱 단단히 증명해내야 할 창작자들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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