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경제적 정체와 생산성 저하의 실존적 위기를 맞고 있다.”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2024년 내놓은 ‘드라기 보고서’의 골자다. 이를 근거로 규제 혁신과 재정 개혁 등 권고안 383개를 내놨지만 올해 7월까지 EU 법률에 반영된 것은 15.7%에 불과했다. 수년 전부터 나온 여러 경고를 무시하는 사이에 유럽 경제는 헤어나올 수 없는 위기에 빠졌다.
유럽 위기의 본질에 대해 지난 8월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유럽은 오랫동안 러시아의 값싼 에너지, 수출을 받아주던 거대한 중국 시장, 미국의 안보 우산이라는 세 기둥 위에 서 있었다”며 “지금 모두 흔들리고 있다”고 분석했다.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첫 번째 기둥을 무너뜨렸다. 2021년 EU 가스·액화천연가스(LNG) 수입량의 45%를 차지한 러시아산 비중은 지난해 12%로 떨어졌다. EU는 러시아산 LNG 수입을 내년 1월부터, 파이프라인 가스는 내년 9월 30일부터 전면 금지하는 법을 올해 1월 확정했다.
빈자리는 미국산 LNG가 채웠다. 지난해 EU LNG 수입량의 56.6%가 미국산이었다. 러시아에서 파이프라인으로 들여오던 장기계약 가스와 달리 LNG는 국제 현물시장의 충격을 그대로 받는다. 이란 전쟁으로 호르무즈해협이 막히고 카타르의 LNG 생산이 멈추자 유럽 가스 기준 가격은 3월 한 달에만 60% 가까이 뛰었다.
가스값 급등은 제조업 비용 상승과 수익성 저하로 이어졌다. 독일 연방통계청에 따르면 화학, 금속, 유리 등 에너지 다소비 업종의 생산은 2022년 2월부터 올해 3월까지 15.2% 감소했다. 이들 업종 종사자는 같은 기간 5만3200여 명 줄었다.
타격이 가장 큰 나라는 독일이다. 독일의 지난해 대중 수출은 813억유로로 1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핵심은 자동차다. 독일경제연구소(IW)에 따르면 독일 자동차·부품의 대중 수출은 2022년 약 300억유로에서 지난해 140억유로 미만으로 반 토막 났다. 지난해에만 30% 이상 줄었다.
이에 비해 중국은 유럽 안방을 파고들었다. 시장조사업체 이노베브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이 EU에 수출한 승용차는 62만 대에 달했다. 금액 기준으로도 EU의 대중 자동차 수출(160억유로)이 중국의 대EU 수출(220억유로)에 역전됐다. 유럽자동차제조협회(ACEA)에 따르면 올해 1~4월 EU 신차 등록에서 중국 브랜드 점유율은 약 6%로 1년 전(3.2%)의 두 배가 됐다.
드라기 전 ECB 총재는 “유럽의 거대한 자기만족 시대는 끝났다”며 “근본적인 변화와 민간·공공의 투자 혁신 없이는 느리고 고통스러운 쇠퇴를 피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김주완/한명현 기자 kjw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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