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현지시간) 프랑스 전역이 55만 명 이상의 시위대로 뒤덮였다. 물가가 치솟는 가운데 정부가 국내총생산(GDP)의 120%에 육박한 국가부채 비율을 이유로 재정지출 축소를 추진하자 시민들이 반발한 것이다. 성장 엔진도 식고 있다. 유럽을 대표하는 자동차 제조업체인 폭스바겐은 최근 1년 새 독일 공장 두 곳에서 자동차 생산을 중단했다. 1937년 창립 이후 폭스바겐이 본국 생산시설 문을 닫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유럽연합(EU) 내 다른 나라와 기업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탈리아(139%)와 벨기에(110%) 역시 국가부채 비율이 임계점에 이르렀다. 철강기업 티센크루프부터 화학기업 바스프까지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고질적인 재정난과 저성장, 정치 리더십 부재에 우크라이나전쟁과 이란전쟁이 겹치며 무너지고 있는 유럽 경제 및 사회의 현주소를 진단한다.
이날 EU 통계청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유로존(유로화 사용 21개국)의 8월 상품수지는 161억유로(약 24조2100억원) 적자를 기록했다. 1년 전(17억유로 적자) 대비 적자 규모가 아홉 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주력 산업인 기계·자동차 수지가 1년 만에 72억유로 흑자에서 7억유로 적자로 돌아선 영향이 컸다. 같은 기간 에너지 수지 적자도 213억유로에서 267억유로로 불어났다. 에너지를 수입하고 공산품을 수출해 부를 쌓던 유럽의 무역 구조가 무너진 것이다.
저성장 추세는 고착화하고 있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은 유로존 경제 성장률을 올해 1.1%, 내년 1.2%로 전망했다.
이런 가운데 사회와 정치는 퇴행하고 있다. 유럽 각국은 정부 지출의 40%에 육박하는 막대한 예산을 각종 복지에 쏟아붓고도 근로 의욕 저하와 만성적인 인력난에 시달린다. 기업은 숨통을 죄는 EU의 과도한 규제와 에너지 고비용 구조에 공장을 닫거나 다른 대륙으로 탈출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 사이에선 재정개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대규모 시위는 벨기에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유럽 전역으로 확산하고 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유럽의 전후 성장 모델이 무너지고 있으며 과거 상태로 돌아올 가능성은 작다”며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했다.
對中 수출 줄고 수입은 늘어나…美 주둔병력 감축에 국방비 급증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2024년 내놓은 ‘드라기 보고서’의 골자다. 이를 근거로 규제 혁신과 재정 개혁 등 권고안 383개를 내놨지만 올해 7월까지 EU 법률에 반영된 것은 15.7%에 불과했다. 수년 전부터 나온 여러 경고를 무시하는 사이에 유럽 경제는 헤어나올 수 없는 위기에 빠졌다.
유럽 위기의 본질에 대해 지난 8월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유럽은 오랫동안 러시아의 값싼 에너지, 수출을 받아주던 거대한 중국 시장, 미국의 안보 우산이라는 세 기둥 위에 서 있었다”며 “지금 모두 흔들리고 있다”고 분석했다.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첫 번째 기둥을 무너뜨렸다. 2021년 EU 가스·액화천연가스(LNG) 수입량의 45%를 차지한 러시아산 비중은 지난해 12%로 떨어졌다. EU는 러시아산 LNG 수입을 내년 1월부터, 파이프라인 가스는 내년 9월 30일부터 전면 금지하는 법을 올해 1월 확정했다.
빈자리는 미국산 LNG가 채웠다. 지난해 EU LNG 수입량의 56.6%가 미국산이었다. 러시아에서 파이프라인으로 들여오던 장기계약 가스와 달리 LNG는 국제 현물시장의 충격을 그대로 받는다. 이란 전쟁으로 호르무즈해협이 막히고 카타르의 LNG 생산이 멈추자 유럽 가스 기준 가격은 3월 한 달에만 60% 가까이 뛰었다.
가스값 급등은 제조업 비용 상승과 수익성 저하로 이어졌다. 독일 연방통계청에 따르면 화학, 금속, 유리 등 에너지 다소비 업종의 생산은 2022년 2월부터 올해 3월까지 15.2% 감소했다. 이들 업종 종사자는 같은 기간 5만3200여 명 줄었다.
타격이 가장 큰 나라는 독일이다. 독일의 지난해 대중 수출은 813억유로로 1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핵심은 자동차다. 독일경제연구소(IW)에 따르면 독일 자동차·부품의 대중 수출은 2022년 약 300억유로에서 지난해 140억유로 미만으로 반 토막 났다. 지난해에만 30% 이상 줄었다.
이에 비해 중국은 유럽 안방을 파고들었다. 시장조사업체 이노베브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이 EU에 수출한 승용차는 62만 대에 달했다. 금액 기준으로도 EU의 대중 자동차 수출(160억유로)이 중국의 대EU 수출(220억유로)에 역전됐다. 유럽자동차제조협회(ACEA)에 따르면 올해 1~4월 EU 신차 등록에서 중국 브랜드 점유율은 약 6%로 1년 전(3.2%)의 두 배가 됐다.
드라기 전 ECB 총재는 “유럽의 거대한 자기만족 시대는 끝났다”며 “근본적인 변화와 민간·공공의 투자 혁신 없이는 느리고 고통스러운 쇠퇴를 피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김주완/한명현 기자 kjw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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