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캘리포니아의 사막에서 총성이 울렸다. 한 남성이 총으로 쏴버린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애플 아이팟 플레이어였다. 총을 쏜 사람은 메모리 기업 키옥시아의 영업 임원인 스콧 넬슨. 부서진 아이팟 조각은 지금도 그의 책상에 놓여있다고 한다.
아마도 십수년 전일 이 일화는 지난 29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의 보도로 알려졌다. 이 이야기에는 애플과 부품업체들의 오랜 갈등이 담겨 있다. 그의 입장에선 과도했을 애플의 부품업체 관리 방식에 신물이 난 그는 이후에도 애플에 대한 반감으로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고집했다.
소비자에게 애플은 세련된 혁신과 디자인의 상징이다. 하지만 메모리 기업을 비롯해 부품을 납품하는 업체들에 애플은 언제나 자신들을 힘들게 하는 '슈퍼갑'이었다. 그런데 인공지능(AI) 시대가 도래하며 이 관계를 뒤흔들고 있다. 애플이 후려치던 부품을 더 비싸게, 많이 사겠다는 고객들이 나타난 것이다.
경쟁사 영업팀이 서로 마주치도록 회의 시간을 잡는 것도 애플의 전술이었다. 그 가격에라도 납품하지 않으면 협상장에서 마주친 다른 공급사에 계약이 넘어갈 거란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저녁도 먹지 못한 채 협상이 자정을 넘기는 일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2015년 말 샌디스크가 더 비싸게 사겠다는 고객을 이유로 추가 공급을 거절하자, 애플의 조달 책임자 토니 블레빈스는 샌디스크 영업사원에게 "최고경영자(CEO)가 무릎 꿇고 기어 들어오게 하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당시 샌디스크의 CEO는 현재 마이크론을 이끄는 산제이 메호트라다. 국내 대기업이 협력업체를 이렇게 대했다면 '갑질'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을 장면들이다.
뒤이어 미국 언론에선 애플이 중국 메모리를 쓰기 위해 미국 정부에 로비를 벌이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WSJ에 따르면 애플은 지난해 60억 달러에 샀던 양의 낸드 플래시에 올해 250억달러를 내야할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메호트라는 기다렸다는 듯 반박했다. 몇 년 전 일부 고객이 가격을 과도하게 끌어내렸고, 그 결과 2023년 메모리 가격이 3분의 1로 급락해 업체들 또한 적자에 빠지면서 생산시설에 투자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맥락상 애플의 불만에 대해 '현재 AI의 메모리 병목은 애플의 책임이 크다'는 반격이었다.
메모리 기업들이 할 말을 하게 된 데엔 새로운 큰 손들이 있다. AI 붐을 타고 초대형 데이터센터를 짓고 있는 하이퍼스케일러들이다. 테크인사이츠 추정에 따르면 과거 애플의 낸드 플래시 구매량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메타, 구글을 합친 것의 두 배였지만, 지금은 이 네 기업의 구매량이 애플의 두 배다.
딜런 파텔 세미애널리시스 CEO는 지난 23일 한 대담에서 "과거 불황기 애플이 메모리 업체들을 쥐어짰다면, 지금은 메모리 업체들이 애플을 쥐어짜고 있다"고 했다.
애플은 구애를 보냈던 중국에서도 퇴짜를 맞은 것으로 보인다. CXMT에 장기계약을 요청했지만, 제시한 가격이 너무 낮고 중국 내부 수요를 맞추기에도 빠듯한 상황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는 보도가 최근 나왔다.
인텔은 메모리 부족에 따른 가격 상승이 PC 수요를 압박하고 있고, 이에 따른 시장 축소가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AI 투자는 늘어가는데 돈을 벌어다 줄 본업이 흔들린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주가가 급락한 것이다.
지난 26일 공개된 앤트로픽의 증권신고서에서 AI 사업의 빠른 성장과 수익성 개선이 확인되며 반도체주에 잠시 훈풍이 불었지만, 인텔의 실적 발표는 메모리 가격 급등 이면에 대한 우려를 또 다시 불러 일으켰다.
현재는 AI 투자의 병목인 메모리를 확보하려는 하이퍼스케일러들의 경쟁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메모리 기업과 새로운 고객사들의 관계는 과거 애플과 그랬던 것처럼 양극단을 오갈까?

하이퍼스케일러도, 메모리 기업도 양극단을 고집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공급사 입장에서도 지금의 협상력을 이용해 고객을 쥐어짜는 건 오히려 판을 깰 수 있다는 판단을 할 수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7월 "메모리 가격이 비정상적인 수준"이라고 말한 게 이를 보여준다.
하이퍼스케일러들도 전례 없는 AI 발전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메모리가 꼭 필요하다. 데이터센터를 지어놓고 가동을 못하는 것보다 감당할 수 있는 가격에 몇 년 치 물량을 확보하는 게 유리할 수 있다.
공급사는 마진을 다소 낮추더라도 장기 수요를 확보하고, 고객사는 핵심 병목을 해소하면서 AI 경쟁력을 다질 수 있는 장기공급계약(LTA)이 확산하고 있는 이유다.
SK하이닉스는 이번 3분기 실적발표에서 글로벌 주요 고객 14곳과 LTA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2027~2028년 생산능력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장기 수요를 확보했다는 설명이다. 삼성전자 역시 10개 고객과 계약을 체결했고 추가로 10개 기업과 협상 중이다.
물론 주식시장에서는 여전히 LTA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도 메모리 업계에선 호황기에 맺은 장기계약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일이 많았다. 최근 잇따르는 주가 변동성 또한 이 같은 과거의 유산이라는 분석이다.
다만 메모리 기업과 고객사 모두 '오래' 거래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AI 시대 메모리 반도체의 위상은 과연 달라진 것일까. LTA라는 절충이 메모리를 둘러싼 갑과 을의 오랜 갈등을 해결해줄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으로 보인다.
박한신 기자 ph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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