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가만 오르지 월급은 안 오르네요. 일본인은 점점 가난해지고 있습니다."(도쿄의 한 40대 회사원)
일본은행이 13년간 추구해온 물가 목표 2%에 도달했다. 물가가 좀처럼 오르지 않던 일본 경제가 오랜 디플레이션 수렁에서 벗어나는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하지만 축하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원유 가격 상승과 엔화 약세에 따른 생활비 부담이 여전한 데다 임금과 소비가 뒷받침하는 안정적인 물가 상승을 정착시키는 과제가 남아 있어서다. 일본은행의 정책도 물가를 끌어올리는 데서 추가 상승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일본은행은 2013년 1월 물가안정 목표 2%를 도입했다. 같은 해 봄 취임한 구로다 하루히코 전 총재는 국채 등을 대량 매입하는 ‘차원이 다른 금융완화’를 시작하며 약 2년 안에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임금 인상이 더디고 소비가 부진한 가운데 기업들도 고객 이탈을 우려해 가격 인상에 신중했다.
우에다 총재는 “사람들의 기대 물가상승률이 0% 정도에 강하게 고정돼 있었다”며 “이를 풀어내는 데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했다”고 돌아봤다.
변화의 계기는 해외발 인플레이션과 국내 인력 부족이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가격 상승과 미국의 관세 정책 등이 물가를 밀어 올렸다. 일본 내에서는 인력난이 심해지면서 기업들이 인재 확보를 위해 임금을 높이고, 늘어난 인건비를 제품과 서비스 가격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신선식품을 제외한 소비자물가지수의 연평균 상승률은 4년 연속 2%를 웃돌았다. 일본은행은 이런 물가 상승이 일시적 충격을 넘어 지속될 수 있는지를 살핀 끝에 기조적 물가상승률도 목표 수준에 도달했다고 판단했다.
다만 우에다 총재는 “2% 물가상승률의 지속적·안정적 실현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며 선을 그었다. 목표 수준에 한 차례 도달하는 것과 그 수준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뜻이다. 그는 “승리 선언을 하는 단계에는 좀처럼 이르지 못한다”고 말했다.
우에다 총재는 “‘나쁜 물가 상승’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인플레이션으로 소득 수준이 낮아지는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물가 목표에 도달했더라도 임금이 충분히 오르지 않으면 가계의 실질 구매력은 떨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당장 생활물가 상승 압력도 이어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10월 3000개 이상의 식음료 품목 가격이 올랐다. 11월에도 전년 동월의 약 10배인 1500개가량의 가격 인상이 예상된다. 9월 2.1%였던 신선식품 제외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내년 초 3%까지 높아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내년 춘계 노사 임금협상이 중요한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우에다 총재는 “2%의 물가상승률이 전제로 반영돼 임금협상이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기업과 근로자가 앞으로도 물가가 2% 안팎에서 오를 것으로 예상하고, 그에 맞춰 임금과 가격을 결정하는 관행이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에다 총재는 기조적 물가상승률의 “상방 위험이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존재한다”고 밝혔다. 중동 정세에 따른 원유 가격 상승과 강한 인공지능(AI) 관련 수요, 지속되는 엔화 약세가 물가를 추가로 밀어 올릴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일본은행은 경제·물가·금융 상황에 따라 정책금리를 계속 올리고 금융완화 정도를 조정하겠다는 방침을 제시했다. 우에다 총재도 “정착을 위해서는 가만히 기다리기보다는 적절히 금융정책을 조정해 나갈 것”이라며 다음 12월 회의를 포함해 매 회의에서 금리 인상 여부를 판단하겠다고 밝혔다. 시장에서는 현재 약 1.25%인 정책금리가 향후 2.5% 수준까지 오를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대규모 금융완화의 흔적을 줄이는 작업도 빨라진다. 일본은행은 이날 보유 상장지수펀드(ETF)의 연간 매각 규모를 내년 1월부터 장부가 기준 약 3300억엔에서 약 8600억엔으로 늘리기로 했다. 매각 완료까지 걸리는 기간은 약 112년에서 약 43년으로 단축된다.
AI·반도체 수요에 힘입은 증시 호조와 거래 규모 확대가 매각 가속의 배경이다. 우에다 총재는 “43년 정도라면 시장 등에 미치는 영향도 제한적일 것으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시장도 매각 확대 결정에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물가를 올리기 위해 이례적인 정책 수단을 동원했던 일본은행은 이제 어렵게 도달한 2%를 지키면서 가계 구매력과 경기를 함께 살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13년 만의 목표 도달에도 우에다 총재가 ‘승리 선언’을 유보한 이유다.
도쿄=최만수 특파원 bebop@hankyung.com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