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꺄르르 이인의 러브 토크] 4화. 욕망을 포기하지 마라
도대체 뭘 원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이것저것을 가지려 하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고개를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욕망은 완전히 채워지지도 사위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겠죠. 종교인들처럼 수양을 통해 욕망을 다스리거나 아니면 진짜 자신이 바라는 걸 욕망하거나!
라캉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자신의 욕망’은 무언가를 더 갖고 싶다거나 돈을 더 벌고 싶다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 염려하는 게 아닌, 남들이 다 하니까 따라서 하는 게 아닌, ‘진짜 나 자신이 원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뭘 바라는지 알지 못합니다. 의식으로서 나는 결코 내 욕망을 알 수 없죠.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은 내가 아직 모르는 내 안의 엄청난 욕망, 나를 뒤바꿀 수 있는 무의식을 저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라캉 정신분석학의 윤리이기도 하지요.
내 욕망의 표출은 곧 나의 모습이지만 그것들만으로는 나를 다 설명할 수 없죠. 현실에는 언제나 ‘나머지’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나머지를 말끔하게 풀어내고자 욕망은 솟구치죠.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음을 거름삼아 욕망은 우거집니다. 욕망의 용솟음을 따라 ‘존재하는 나’와 ‘욕망하는 나’가 하나되길 바라며 ‘진짜 내 모습’이 되고자 달음박질치다 보면, ‘의식으로서 나’만이 아니라 ‘무의식으로서 나’를 만나게 됩니다. 라캉이 무의식의 주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랑은 미처 몰랐던 무의식과 욕망을 만나는 사건입니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날것 그대로의 욕망을 만나게 됩니다. 민망한 모습일 때도 있지만 그것이 나의 욕망이고 내 모습입니다. 얄밉고 속 좁고 암상스럽고 어린애처럼 유치한 모습들은 어른들 안에도 늘 있습니다. 그동안 자아가 억압하고 있어서 미처 알지 못했을 따름이죠. 내 안의 다른 얼굴들과 욕망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부둥켜안을 때 인간은 성숙합니다. 지금보다 훨씬 자유롭고 느긋한 사람이 되죠. 이처럼 사랑은 수많은 지층을 뚫어서 밑바닥에 석유처럼 잠긴 무의식을 뽑아내는 시추작업입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에티카』에서 말합니다. “인간은 신체의 행동 대부분이 오로지 정신의 의지와 사고의 기능에 의해서 규정된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신체능력의 한계를 명확하게 규정한 사람은 없다.” 한마디로 우리는 자신을 너무나 모른다는 주장이죠. 우리는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살면서 반드시 해내야 하는 숙제, 자신을 아는 일입니다. 고대 그리스 델포이 신탁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너 자신이 얼마나 못났는지 주제를 알고 분수를 알라’는 핀잔이 아닙니다. ‘너 자신이 미처 모르고 있는 훌륭함과 아름다움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네가 스스로를 알면 너는 얼마든지 멋지고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귀띔이죠.
우리는 때때로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이 바라던 삶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고 푸념합니다. 그렇지만 진짜로 자신이 뭘 바라는지는 잘 모르겠다며 새로운 도전은 어려워하지요. 이렇게 삶이라는 어려움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작아집니다. 하지만, 바로 ‘이 어려움’이 인간과 세상의 특성이며, 이 어려움에도 포기하지 않고 극복하려는 안간힘이 인문학 속에 깃든 ‘용기’입니다. 세상엔 지름길이 없으며 인생엔 하나의 정답이 있지 않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던 자신을 믿고 용기내야 하지요.
‘의식으로서 나’가 그어놓은 빗금을 ‘무의식으로서 나’는 뚫고 나갑니다. 나는 얼마든지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이 내 안에 있습니다. 내가 내 욕망을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도대체 뭘 원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이것저것을 가지려 하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고개를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욕망은 완전히 채워지지도 사위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겠죠. 종교인들처럼 수양을 통해 욕망을 다스리거나 아니면 진짜 자신이 바라는 걸 욕망하거나!
라캉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자신의 욕망’은 무언가를 더 갖고 싶다거나 돈을 더 벌고 싶다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 염려하는 게 아닌, 남들이 다 하니까 따라서 하는 게 아닌, ‘진짜 나 자신이 원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뭘 바라는지 알지 못합니다. 의식으로서 나는 결코 내 욕망을 알 수 없죠.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은 내가 아직 모르는 내 안의 엄청난 욕망, 나를 뒤바꿀 수 있는 무의식을 저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라캉 정신분석학의 윤리이기도 하지요.
내 욕망의 표출은 곧 나의 모습이지만 그것들만으로는 나를 다 설명할 수 없죠. 현실에는 언제나 ‘나머지’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나머지를 말끔하게 풀어내고자 욕망은 솟구치죠.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음을 거름삼아 욕망은 우거집니다. 욕망의 용솟음을 따라 ‘존재하는 나’와 ‘욕망하는 나’가 하나되길 바라며 ‘진짜 내 모습’이 되고자 달음박질치다 보면, ‘의식으로서 나’만이 아니라 ‘무의식으로서 나’를 만나게 됩니다. 라캉이 무의식의 주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랑은 미처 몰랐던 무의식과 욕망을 만나는 사건입니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날것 그대로의 욕망을 만나게 됩니다. 민망한 모습일 때도 있지만 그것이 나의 욕망이고 내 모습입니다. 얄밉고 속 좁고 암상스럽고 어린애처럼 유치한 모습들은 어른들 안에도 늘 있습니다. 그동안 자아가 억압하고 있어서 미처 알지 못했을 따름이죠. 내 안의 다른 얼굴들과 욕망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부둥켜안을 때 인간은 성숙합니다. 지금보다 훨씬 자유롭고 느긋한 사람이 되죠. 이처럼 사랑은 수많은 지층을 뚫어서 밑바닥에 석유처럼 잠긴 무의식을 뽑아내는 시추작업입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에티카』에서 말합니다. “인간은 신체의 행동 대부분이 오로지 정신의 의지와 사고의 기능에 의해서 규정된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신체능력의 한계를 명확하게 규정한 사람은 없다.” 한마디로 우리는 자신을 너무나 모른다는 주장이죠. 우리는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살면서 반드시 해내야 하는 숙제, 자신을 아는 일입니다. 고대 그리스 델포이 신탁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너 자신이 얼마나 못났는지 주제를 알고 분수를 알라’는 핀잔이 아닙니다. ‘너 자신이 미처 모르고 있는 훌륭함과 아름다움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네가 스스로를 알면 너는 얼마든지 멋지고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귀띔이죠.
우리는 때때로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이 바라던 삶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고 푸념합니다. 그렇지만 진짜로 자신이 뭘 바라는지는 잘 모르겠다며 새로운 도전은 어려워하지요. 이렇게 삶이라는 어려움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작아집니다. 하지만, 바로 ‘이 어려움’이 인간과 세상의 특성이며, 이 어려움에도 포기하지 않고 극복하려는 안간힘이 인문학 속에 깃든 ‘용기’입니다. 세상엔 지름길이 없으며 인생엔 하나의 정답이 있지 않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던 자신을 믿고 용기내야 하지요.
‘의식으로서 나’가 그어놓은 빗금을 ‘무의식으로서 나’는 뚫고 나갑니다. 나는 얼마든지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이 내 안에 있습니다. 내가 내 욕망을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