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익경 기자가 만난 세계의 건강한 한국인-13] ‘장애를 긍정이란 단어로 딛고 미 주류사회에서 활동한 백악관 장애정책위원(차관보) 박동우(조셉 박)’

입력 2015-10-20 09:28  


문=‘장애도 자산이다.’라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시련을 이겨내라는 말씀을 종종 하시는데, 장애를 자산으로 생각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으신 걸로 압니다. 어떻게 장애를 겪게 되셨고, 어린 시절을 회상하신다면요?
답=저는 3세때 앓은 소아마비로 인해 왼팔이 마비가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엔 장애자라 보기보다는 불편한 정도였습니다. 장애도 선천적인 장애가 있는 반면, 저는 후천적으로 장애가 된 셈입니다. 이런 걸 볼 때 사실 누구나가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장애를 겪는 분들에게 잘 대해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며, 한쪽 팔을 못쓴다는 주변의 눈초리, 시선을 늘 느끼며 살았고, 특히나 체육시간에는 다른 급우들과 어울릴 수 없었고, 늘 배제되어 혼자 떨어져 있었어야 했습니다.

문=그럼 미국 이민은 언제 오셨으며, 장애를 겪는 입장에서 한국과 다른 점은 무었이었습니까? 이를테면 장애인에 대한 미국사회의 인식, 학교 생활 같은 게 어땠는지요?
답=제가 고등학교 1학년때즈음 1970년 5월 10일로 기억하는데요, LA로 가족 이민을 오게 됐습니다. 미국 학교는 18세가 넘으면 고등학교에서 안받아주는데요, 제 동생의 학교 입학에 따라갔다가 학교 카운셀러가 입학용지에 제 것도 쓰라고 해서 얼떨결에 썼다가 동생과 동 학년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장애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은 학교에서부터 달랐습니다. 미국학교에 입학하여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선 GPA(학점)가 좋아야 했고, 공부에 대한 열정으로 모든 과목에서 A를 받았지만 유일하게 체육에서 C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미스’라는 체육 선생님을 찾아가니 너는 아무것도 안 했으니 그 점수를 받은 것이라고 점수를 잘 받고 싶으면 학교가 끝 날 때 까지 수영장을 20번을 왕복하라고 하여, 저는 중간에 포기 하고 싶은 마음이 몇 번이나 일어났지만 끝까지 참으며 한나절이 걸려 해냈고, 결국 A를 받았습니다. 장애인이라고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의 차별이 없다는 것에 감사했고, 그 때 가진 자신감으로 다음 학기에는 테니스에 도전하였죠. 테니스 선생님을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A를 받을 수 있겠냐는 질문에 나는 너에게 A를 줄 생각이 없다라고 하더군요. 저는 오기가 생기어 학교 카운셀러를 찾아가서 학점대신 과목을 패스나 노패스로 학점을 받을 수 있냐는 질문에 카운셀러는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고, 열심히 한 팔로 서비스, 발리, 등 테크닉을 연습하여 결국 패스를 통해 학점을 받았습니다. 고교 졸업 때 GPA가 3.83이라는 높은 점수를 받게 되었고, 서던 캘리포니아(USC) 경영학과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이 제가 장애를 가졌어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고, 운동이 장애인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틈틈이 연습하던 골프도 한팔 밖에 못쓰지만 보기게임까지 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고, 98년도에는 미국에서 메인 대회 중에 하나인 LA마라톤 대회에 나가서 6시간 12분 20초의 기록으로 완주하는 경험도 갖게 되었습니다.

문=한국도 특수체육이란 이름으로 장애인들을 위한 체육프로그램이 생겨나고 있지만 아직도 사회적 관심도나 지원은 미약하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면 학교졸업을 하고 어떤일을 하셨는지요?
답=대학교 다니던 중 77년 여름 방학때 LA에 소재한 ‘한인 건강 센터’라고 이화수 박사님께서 설립한 단체에서 community worker로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한인 커뮤니티에는 매맞는 여성들이 많았는데, 그런 여성들을 피난시키고, 구조하고 도와주며, 쉘터에 지내게 하며 public service에 연결 시켜주는 등의 봉사활동을 하며, 한인 사회의 어두운 면을 알게 되었고, 지속적으로 한인봉사센터나 가정이 불우한 학생들을 관리하고 돕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현재 미국의 굴지의 통신 기업인 AT&T에서 저희 센터를 포함한 한인단체들을 찾아와 한인들을 채용하려고 해도 안 된다고, 소개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수한 유학생 등 영어가 되고, 학위를 가진 사람들을 보냈는데도 응시한 사람들이 가는 족족 다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떨어지는지 원인을 알고자 실습 삼아 응시해봤는데 질문들이 상당히 어렵고 까다로운 것이었습니다. ‘이래서 떨어지는구나’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2주뒤 신체검사하러 오라는 통보를 받고 AT&T에 입사하여 서비스 팀장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문=아직도 LA에서 ‘조셉 박’을 수많은 한인들이 회자하고, 당시 주요언론까지 놀라게 한 AT&T의 전신인 퍼시픽 벨을 상대로 한 5천만불 소송 사건이 AT&T에 일하시는 동안 일어난 겁니까?
답=그렇습니다. 85년도였죠. 회사가 영어를 할 줄 모르는 한인들에게 필요 없는 플랜을 적용시켜 바가지 요금을 씌우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회사에 일을 하고 있는 입장이었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써 가정과 사회 정의 사이에서 정말 많은 고민을 했으나 부당함과 불의를 좌시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당시 남가주 총학생회 회장이었던 이무곤씨와 매튜 하, 한국언론의 대표로 현 미주 중앙일보 사장인 고계홍 당시 사회부 기자가 주축이 되어 여론을 불러일으켰고, 다른 한인단체들이 합심하여 회사와 협상을 벌이도록 하여 가주 공공기관에서 환불하라는 명령으로 사건이 해결됐습니다.

문=쉽지 않은 결정이셨겠습니다. 그럼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요?
답=우선 미국에서의 정치입문과 활동이라는 것이 한국 같은 시스템이 아니라 밑바닥부터 꾸준히 사회정의와 공익을 생각하고 사회활동에 참여하며 베이스를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한인 사회에서 대학시절부터 꾸준히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을 위해 음지에서 봉사를 해왔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재정적인 도움을 줄 능력은 없었습니다만 미국 생활 46년간 미국 주류사회에서 활동하면서 한번도 한인사회를 떠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주류사회의 지원을 유치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습니다. 1988년 한미 박물관 건립시 주정부 25만불을 유치한 것은 저의 정치권 로비의 열매라고 할 수있겠습니다. 그러던 중 직접적 원인은 77년 LA 탐 브래들리 시장의 재선 선거캠프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이 계기가 되었고, 매 2년마다 선거에서 소수민족과 이민자들을 돕는 일에 적극적인 민주당의 당원으로 활동을 하게 됐고, 99년부터 2004년까지 5년간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임명에 의해 장애정책위원으로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AT&T에 근무 할 때는 BEA(Bell employees for adoptability)라는 걸 만들어 직원들 권리 찾기, 장애인 직원 카운셀링등을 추진하였고, AT&T 에 한인 고객센터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한인들이 많이 사는 가든그로브시의 도시계획위원을 역임했고, 오렌지 카운티 내 시니어 시티즌 어드바이져리 커미셔너(senior citizen advisory commissioner)로 활동하며 노인들이나 장애인들의 교통편의를 제공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 당시 한미 노인회에 55만불의 기금과 17인승 버스 두 대를 유치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활동들이 저의 바탕이 되었고, 2008년 오바마 대통령 선거 때 정말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네바다 주에서 공화당으로 치우치는 상황에서 1주일 휴가를 내서 가서 돕기도 했습니다. 이런 자발적인 자원봉사 없이 저절로 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그런 활동들이 결국에는 오바마 정부의 차관보로 임명되었다고 봐야겠군요. 미국에서 고위직 공무원이 되기 위한 절차나 과정에 대해 설명을 해주신다면요?
답=맞습니다. 사람들은 갑자기 제가 백악관 차관보로 임명된 줄 알지만 이런 사회활동들이 없었다면 아마 저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임명을 받는 과정에서 FBI, 백악관, IRS(국세청)에서 철저한 배경조사가 있었고, FBI에서 고등학교 친구 5명, 대학교 친구 5명의 이름을 대라더군요. 저의 학창시절의 성품, 학교생활까지 다 조사를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한인 2세, 3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꿈은 어린 시절부터 구체적으로 결정하면 좋겠고, 학창시절부터 지역사회와 관계, 직장관계, 친구관계 등을 잘 갖는 것이 중요하고, 자기 관리를 잘할 것을 이야기 해주고 싶습니다.
그런 백그라운드 조사, 대통령 임명이 있은 후 상원에서 인준이 있는데, 상원에서는 이 후보가 얼마나 전문성이 있는지를 알아봅니다. 기억에 남는 것이 저와 함께 후보가 된 사람이 유태인인데 예전에 집필한 책 속의 주장을 문제 삼아 인준통과가 불 확실 할 때 유태인 단체들이 발 빠르게 움직여 그 사람의 인준이 통과되는 것을 보고, 과연 제가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한인단체들이 이렇게 발 빠르게 힘있게 저를 서포트 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 인준이 끝난 이후 부시 대통령이 임명했던 기존의 10명과 오바마 대통령에 의해 새로 임명된 5명의 위원을 포함한 15명중 유일하게 동양인으로 장애정책위원에 내정되었습니다.

문=백악관 장애정책위원회는 어떤 역할을 하며, 차관보 시절 이룬 성과나 보람된 일이 있으신다면요?
답=대통령과 의회에 하나의 조언자가 되는 역할인데, 1년에 한번 장애인의 상황에 대해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며, 이슈가 있을 때마다 별도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일을 열거하자면, 미국 정부는 세계 어디 있든 ADA라는 장애인 보호법을 준수해야 합니다. 당시 민주평통 7기로 마침 한국에서 평통 회의에 참석을 위해 방한 했을때 주한 미 대사관을 공식 방문하여 이 법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나를 감사해보니 현지 한국 직원은 많으나 장애인 직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완전히 배제 하지 않았다면 말이 되지 않았죠. 그리고 대사관 행사는 NGO등 여러 단체를 포용해야 하는데 제가 조사를 해보니 장애인 단체는 연락한 적이 한번도 없었고, 그 외 대사관 통역도 수화가 있음에도 전혀 홍보를 하지 않는 등을 구실로 아주 신랄하게 비판 보고서를 작성하여 백악관에 강력하게 시정할 것을 건의한적이 있습니다. 그 후 제 페이스북으로 한국의 한 장애여성으로부터 ‘주한 미 대사관’에서 장애인을 위한 설명회가 있어 초대받았다며, 이런 일은 처음이고 박위원님 덕분인 것 같다라는 메세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슈퍼 스톰 Sandy가 왔을 때 공익광고(PSA, public service announcement)를 통해 피해자들이 어떤 보상을 받고, 해결책 등을 정부에서 알려줬는데 장애인 고용 촉진의 달에 PSA에 제가 캐스팅되어 시각, 청각, 지체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미국 전역의 영화관에서 4700만명이 그걸 봤으며, 장애인들 또한 재해,재난 대비와 피해대책에 대해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게 홍보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모든 정책에 있어 언어 미숙자를 꼭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을 끊임없이 제기 했습니다. 오바마 케어 같은 경우도 한국어 이야기 하면 아직 미국 사회에서 극소수인 한국사람 입장만 이야기 하게 되는 형상이니 히스페닉, 중국, 아랍 등의 커뮤니티를 묶어서 언어 못해도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걸 강조했습니다. 이민자에 의해 세워진 이 나라에서 미국 정부가 이민자들의 언어뿐 아니라 문화적인 면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기조를 갖고 일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일은 1978년 백악관 장애정책위원회가 설립된 이후로 청문회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활용한 적이 없었지요. 그 당시 미국에서는 예산을 줄이는 상황이었는데, 노동부, 상무부, 국무부, 교육부, 보건 복지부 같은 우리 장애와 관련이 있는 부서를 모아 국회 청문회를 통해 정부가 예산을 줄였을 때, 장애 복지 프로그램에 어떤 영향이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여 예산을 지켜냈습니다. 무엇보다 저희의 입장에서는 청문회를 통해 해당부서에서 준비를 한다는 게 우리(장애위원)의 위상을 올리는 일이었고, 실무자급은 차관보급에서 하는데 노동부 캐서린 마티네스, 교육부 수 수완슨, 보건 복지부 하워드 고, 연방 재해부 말티 와스 등과 유대관계를 긴밀히 하며 일을 수행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 일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문=곁에서 지켜본 오바마 대통령의 인상과 오바마 정부의 장애정책은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답=오바마 대통령은 정말 포용성이 있는 분이십니다. 힘들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다 챙기는 분입니다. 대개의 경우 위정자들이란 사람들이 하는척 하는 시늉은 정말 잘 냅니다. 이분 같은 경우 장애인 스스로 중요한 교통부나 국무부, 노동부 같은 부서에 장애인 자신들을 임명해서 그런 영향력 있는 자리에서 소신껏 일할 수있게 해줍니다. 시늉만 내고, 보여주기 위한 전시행정 정도로 그칠 것이라면 국장급을 임명하면 끝나는 것이겠죠. 국무부나 교통부에는 사지가 없는 장애인을 임명하여 움직일 수있는 권리를 스스로 체크업하고 항공기, 버스, 열차, 선박 등 모든 교통수단에 장애인들이 불편을 겪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백악관에 한번도 장애정책에 관한 비서관이 없었는데 시각장애인 ‘칼린 베어’를 임명하여 장애정책에 관한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게끔 하고 있습니다. 정부 각 부처 고위직에 장애인이 임명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정부가 그만큼 장애인 고용에 솔선수범하고 있고, 최고 통치권자의 장애정책에 관한 의식이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문=미국에서 고위공무원으로 쌓은 경험과 인맥 등을 한국사회를 위해 쓸 의향은 없으신지, 그리고 한국 정부, 사회에 조언을 한마디 해주시겠습니까?
답=대통령 직속 위원회를 만들면 좋겠습니다. 미국은 백악관 차원에서 컨트롤 타워가 있어 대통령이 직접 챙깁니다. 세월호 같은 경우가 그런 예라고 봅니다. 미국은 FEMA(Federal emergency management agency)라고 재난이 왔을 때 일괄적으로 담당하는 부서가 있어 서로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끔 하고, 대통령이 직접의지를 갖고 일괄적인 일 처리를 하니 효율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제가 한국을 위해 저의 경험이나 공부한 바를 자문하고 공유할 마음은 언제든지 있습니다. 다만 한국 사회가 너무 지나치게 혈연이나 학연, 지연에 얽매여 있다는 걸 절감했고, 그 기득권이 철옹성 같아서 그걸 깨지 못하면 발전은 어렵다 하겠습니다. 그 사람의 학벌이나 출신이나 사시나 행시에 의존하여 사람을 등용하기 보다는 그 한 사람이 장애냐 비장애냐를 떠나 능력이나 사람됨됨이, 얼마나 봉사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느냐가 잣대가 되야 겠지요. 겉으로만 소리 높여 그런 이야기를 할 것이 아니라 사회 지도층부터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조금 더 한국정부에서 해외동포들의 역량을 활용하는 기회를 많이 만들면 세계 속의 한국이 더욱 빛날 것이라 확신합니다.
매년 방학이면 각 나라에서는 워싱턴 D.C에 인턴이나 연수를 파견하여 약 800여명 정도의 인원이 옵니다. 한국에서도 35명 정도 오는데 다른 나라들과 달리 장애인은 한 명도 안보낸다고 합니다. 고생할 거라고 생각해서 안 보내는 건지, 어려서부터 장려를 안했기 때문인지 늘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의 장애인들에게도 기회가 있으면 미국도 나가고, 영어공부도 열심히 하고, 한국의 장애인들도 세계에 위상을 높일 것을 장려합니다. 한국에서는 실로암 복지회관의 효명장학회에서 매년 3~4명의 장애인을 미국으로 보내고 있던데, 거길 통해서 왔던 시각장애인 학생이 현재 한국인 최초로 국비장학생으로 발탁되어 미국 동부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문=예전부터 한국과의 교류에 앞장서고 계시는데, 어떤 일을 해오고 계십니까?
답=저는 제 분야에서 평생 일하면서도 한국과 미국내 한인사회와 끊임없는 촉매역할을 하려고 현재도 노력 중 이고, 한국과 미국의 상호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다방면에서 일해오고 있습니다. 1987년부터 제가 사는 가든 그로브 시와 안양의 교류가 시작됐고, 99년부터 가든 그로브 시의 로터리 클럽에 가입하여 안양의 로터리 클럽과 자매결연을 맺은 후 매년 10명의 고등학생들이 미국과 한국을 오고 가며 교류를 해오고 있습니다. 현재 저는 로터리 클럽 국제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고, 10월이면 안양시민행사가 있는데 2015년에는 가든 그로브 시의 주민으로써 한국전쟁에 참여하여 혁혁한 공을 세워 영예의 훈장을 받은 ‘티보 루빈’씨에게 안양시의회에서 명예시민증과 메달을 수여하는 것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문=앞으로의 활동계획과 끝으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지요?
답=미국에는 5700만명의 장애인이 있습니다.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평등하게, 경제적으로 자립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보통 장애인들이 장애시설에 갇혀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듯 격리가 아니라 사회에 통합되고 포용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이며, 미국의 주류사회와 한인 동포사회의 교량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며, 한인사회의 발전과 권익을 위해서도 늘 그랬듯이 제 역량을 쏟을 생각입니다. 한인들이 선출직 뿐만 아니라 공직에도 많이 진출하여 한인사회의 입장을 알리는 차원에서 한인 2세, 3세들의 진출을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해 도울 생각입니다.
그리고 저는 후천성 소아마비를 앓는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은 한쪽 팔을 쓸 수 없는 장애를 가졌지만 이 병의 특성상 나이가 들면서 팔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지의 장애까지 가져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일은 오늘 같지 않을 것이다라는 신체적, 정신적인 압박이 늘 지배 하는게 사실이지만, 오늘의 온전한 삶,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오늘을 완전 연소하는 인생을 살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서운하게 하고, 괴롭게 해도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좀더 희망찬 앞을 내다보고, 긍정적으로 도전적인 마인드를 갖고 살아 갈려고 노력합니다. 윈스턴 처칠이 이야기 했죠. ‘돈을 잃는 것은 적게 잃는 것이다. 명예를 잃는 것은 크게 잃는 것이다. 그런데 용기를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다.’라고요. 장애를 겪는 사람이나 현실의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절망하고 불평하기 보다는 내가 극복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더욱 중요하다고 봅니다. 신체의 장애보다 마음의 장애야 말로 우리 시대가 극복해야할 과제인 것 같습니다. 내 손가락에 가시는 그렇게 아파하면서도 남의 괴로움이나 아픔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죠. 우리가 돈에 모든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병폐속에 살아가지만, 인생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나누고 어떻게 돕느냐에 따라 그 인생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믿고 있으며, 사회적 약자나 소외계층에 더욱 관심을 갖고,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이다라는 인식들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특별하지 않고, 보통 사람인데도 봉사를 하는 데는 특별한 영역이 없다는 것이 제가 살아오면서 느낀 바이고, 대부분이 성공한 후에 봉사를 하는데 저는 보통사람 보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열성적으로 평생 봉사하는 자세로 살아 온 것을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현장인터뷰 강효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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