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고학회, 한국건축역사학회 등 27개 학회와 한국국가유산실측설계협회, 한국문화유산협회 등 6개 협회는 12일 서울 중구 상연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내 1호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종묘 앞 세운4구역에 고층빌딩을 개발할 수 있도록 한 서울시의 개발계획 변경을 규탄하는 공동 입장을 냈다.
이들은 "세계유산 종묘의 하늘과 시야를 가리는 고층 개발의 시도를 단호히 규탄한다"며 "고층 건물의 배치는 종묘의 가치와 존엄을 훼손하는 행위이며 우리의 삶에서 역사적 전통과 기억을 제거하고 문화적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종묘는 조선의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종묘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를 인정, 지난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했다. 국내에서는 처음이다.
갈등은 지난 30일 서울시가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및 4구역 재정비촉진계획 결정'을 고시하면서 시작됐다. 서울시의회가 지난 2023년 10월 '서울특별시 문화재 보호 조례' 제19조 제5항을 삭제하면서 '문화재 보존지역(100m) 밖 건설공사에 대한 재검토 조항'이 사라진 것. 이에 종묘와 약 180m 떨어진 세운4구역에도 종로변 98.7m, 청계천변 141.9m 높이의 고층빌딩이 들어설 수 있게 되자 문화체육관광부와 국가유산청 등이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문화유산 등재 후에도 유네스코가 엄격한 기준을 적용, 세계유산특별법이 정한 '보편적 가치'를 훼손할 경우 등재 취소 절차를 밟을 수 있어서다.
실제로 2009년 독일 드레스덴 엘베계곡 유산, 2021년 영국 리버풀 해양산업도시 유산이 등재 목록에서 삭제되기도 했다.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관련법을 개정해서라도 종묘 일대 고층 빌딩이 들어서는 것을 막겠다"고 밝혔다. 김민석 국무총리도 "종묘 근처에 고층 건물이 들어서면 종묘에서 보는 눈을 가리고, 숨을 막히게 하고, 기를 누르게 하는 게 아닐까"라고 우려를 표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는 종묘와 재개발 지역 거리가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 기준인 100m 밖에 있으며 종묘로부터 멀어질수록 낮은 건물부터 높은 건물까지 단계적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종묘의 문화유산적 가치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맞섰다. 마침 대법원이 서울시가 문화재 인근 고층 건축물 규제 조항을 삭제한 것이 위법하지 않다고 판단함에 따라 법적 위반 사항도 현재로선 없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세계유산은 종묘 내에 있는 정전이다. 정전은 건축물 자체도 역사적인 의미가 있지만 사실은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핵심 내용은 종묘제례악 같은 콘텐츠 소프트웨어"라며 "마치 그 앞에 건물이 지어지는 게 가장 중요한 판단 요소인 것처럼 선동하는 것은 정부가 할 일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서울시는 유네스코가 요청한 종묘 일대 세계유산영향평가(HIA)도 받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세계유산영향평가는 세계유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건축물이나 시설물 등의 설치 사업 등에 대해 조사·예측·평가하고, 세계유산의 보편적 가치를 해치지 않도록 방안을 마련하는 공식 절차다. 서울시는 세계유산영향평가를 받으면 2년 이상 시간이 걸리는 만큼 사실상 재개발을 추진할 수 없다고 보고, 대신 보존상태보고서를 다음 달까지 제출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전해졌다. 보존상태보고서의 경우 국가유산청의 별도 심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
세운4구역 토지주들도 더는 기다릴 수 없다며 거리로 나왔다. 토지주들은 입장문을 통해 "세운4구역에 20년간 지속된 불법·과도 규제에 더는 버티기 어렵다"며 "월세 수입도 없고, 매년 200억 금융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부채만 7,250억에 달해 재개발이 좌초되면 주민들은 생계를 잃는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재개발을 불가능하게 한다면 부당한 행정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물어 민형사상의 책임을 물을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전문가들은 문화유산 보호와 도심 개발, 재산권 보호 사이에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도심 곳곳에 문화유산이 있는 서울의 경우 문화유산 보호에만 치중할 경우 지역이 슬럼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쟁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이창무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개발과 보존이라는 가치는 정답이 없기 때문에 절차의 공정함이 중요하다"며 "합리적인 논의의 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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