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2월 24일 - "이 영상은 100% AI로 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흔해진 문구다. 하지만 허준호 감독의 작품 <학교 맹글라(Haekgyo Manggla: Make Us a School)>를 본 관객들은 그 문구 앞에서 잠시 멈칫하게 된다. 거친 파도가 치는 섬마을, 책상을 내리치며 학교를 지어달라고 절규하는 노인, 그리고 그 곁을 지키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 이 생생한 질감과 묵직한 감정이 정말 '기계'가 만든 것일까?
패션업에 종사하다 AI 크리에이터로 전향한 지 불과 3개월. 허준호 감독은 데뷔작에 가까운 작품들로 뉴욕, 할리우드, 로마, 도쿄 등 국제 영화제를 휩쓸며 단순한 '크리에이터'를 넘어 '국제적으로 공인된 영화감독'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허 감독은 "AI는 나의 배우이자 스태프일 뿐, '컷'을 외치고 장면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라고 강조했다.
■ 섬마을의 외침, 세계를 울리다… 국제 영화제 '싹쓸이'
허 감독의 대표작 <학교 맹글라>는 완도에 사는 노부부가 다문화 가정의 손주를 위해 학교를 만들어달라고 교육청에 호소하는 이야기다. 가장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이 소재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 전 세계 영화제를 강타했다.
그 성과는 실로 놀랍다. 이 작품은 '2025 서울 국제 AI 영화제(SIAFF)'에서 영예의 대상(Grand Prize)을 거머쥐었으며, '오니로스 필름 어워즈 뉴욕(Oniros Film Awards - New York)'에서는 ▲베스트 AI 필름 ▲베스트 뮤직비디오 ▲베스트 영감(Inspirational) 필름 등 무려 3개 부문을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뉴욕 국제 영화제(NYIFA) 파이널리스트, 도쿄·로마·베이징·동남아 국제 영화제 공식 초청작(Official Selection)으로 선정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국내에서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KACES) 원장상을 수상하며 안팎으로 그 가치를 증명했다. 특히, 세계 최대 AI 영화제 중 하나인 '크로마 어워즈(Chroma Awards)'에서는 팝&아시아 팝 부문 TOP 11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 "방구석 유튜버? 아닙니다. IMDb가 인증한 감독입니다”
허준호 감독에게는 최근 또 하나의 특별한 타이틀이 생겼다. 바로 전 세계 영화·드라마 정보의 기준이 되는 IMDb(Internet Movie Database)에 공식 감독으로 등재된 것이다.
IMDb는 개인이 원한다고 프로필을 올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공신력 있는 영화제 수상 내역과 공식 크레딧이 검증되어야만 기록되는 글로벌 산업 데이터베이스다. 허 감독의 프로필에는 현재 <학교 맹글라>의 수상 내역과 함께 'Best Music Video WINNER', 'Best AI Film WINNER' 등의 공식 타이틀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처음에는 저도 방구석에서 영상을 만드는 사람이었죠.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IMDb 등재는 제가 단순히 AI 툴을 다루는 테크니션을 넘어, '서사(Narrative)'를 만드는 연출자로서 세계 시장에서 검증받았다는 뜻이니까요.”
그의 또 다른 작품인 <언체인드 골드(Unchained Gold)> 역시 'AI 국제 뮤직비디오 페스티벌'에서 베스트 스토리텔링상과 AI 작곡상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이는 그가 단순한 운이 아니라, 탄탄한 실력으로 무장한 '준비된 감독'임을 보여준다.
■ 허준호의 제작 비결: "음악이 먼저, 영상은 거들뿐”
그렇다면 단 3개월 만의, 화려한 수상 비결은 무엇일까. 허 감독의 작업 방식은 일반적인 AI 크리에이터와 다르다. 보통은 스토리보드를 짜고 영상을 만든 뒤 음악을 입히지만, 그는 '음악'을 가장 먼저 만든다.
"저는 영상 전공자가 아니라서 사운드 디자인에 약점이 있었어요. 그래서 아예 노래로 승부를 보자고 생각했죠. 클로드(Claude)와 함께 가사를 쓰고, 수노(Suno)로 최백호 선생님 스타일의 호소력 짙은 노래를 먼저 만듭니다. 그 노래의 가사와 리듬이 곧 저의 콘티이자 연출 가이드가 됩니다.”
그의 워크플로우는 치밀하다. 제미나이(Gemini)나 챗GPT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이 곡의 감정에 맞는 5초 단위 키 이미지를 묘사해줘”라고 요청한다. 여기서 나온 프롬프트를 미드저니(Midjourney)와 나노바나나(Nano Banana)에 입력해 이미지를 생성한다. 특히 캐릭터의 얼굴을 일정하게 유지해주는 '나노바나나' 툴은 그의 페르소나를 완성하는 핵심 도구다.
■ "AI는 요술 방망이가 아니다”
사람들은 AI 영상 제작을 '딸각' 한 번이면 끝나는 쉬운 작업이라 오해한다. 허 감독은 이에 대해 고개를 저었다. "5초짜리 영상 하나를 건지기 위해 1,000개, 2,000개의 영상을 뽑아냅니다. 밤을 새우며 수없이 생성 버튼을 누르고, 그중에서 가장 완벽한 컷 하나를 골라내는 과정이죠.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AI가 99개를 만들어줘도, 관객의 마음을 울리는 1개를 선택하는 건 결국 감독의 몫입니다.”
그는 AI가 만든 영상이 주는 특유의 '불쾌한 골짜기'나 뻔한 클리셰를 극복하는 힘은 결국 '디테일한 서사'에 있다고 믿는다. "제 영상을 보고 제미나이가 '저 울었어요. AI인 저도 눈물이 납니다'라는 피드백을 준 적이 있어요. 그때 확신했죠. 기술의 장벽이 낮아질수록, 결국 중요한 건 '무엇을 이야기하는가'라는 문과적 상상력과 인문학적 통찰이 될 것이라고요.”
■ 절망의 끝에서 만난 AI, 전화위복이 되다
사실 그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큰 시련을 겪고 있었다. 12년간 운영하던 패션 브랜드를 정리하고 미국 이민을 준비했으나, 현 미국 정부의 정책 이슈 등으로 인해 지난 8월 모든 계획이 무산된 것이다.
"미국에 갈 수도 없고, 돈은 묶이고… 정말 앞이 캄캄했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방구석에서 AI 영상을 독학하기 시작했어요. 하루 2~3시간만 자며 미친 듯이 파고들었죠.”
절박함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재미 삼아 올린 <젤리보이> 영상이 바이럴 되며 기회를 얻었고, 이제는 에미상(Emmy Awards) 노미네이트 경력이 있는 감독과 협업하여 장편 AI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는 위치에 올랐다.
■ "기술은 50%를 자동화한다, 나머지는 인간의 몫”
이제 막 발걸음을 뗀 AI 영상 시장. 허 감독은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
"기술은 매일 발전합니다. 나노바나나 1이 초등학생 수준이었다면, 프로는 대학원생 수준이죠. 기술적인 장벽은 점점 사라질 겁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화려한 영상미'보다는 '메시지'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누구나 감독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허 감독은 단호하게 말한다. 그 길을 걷게 하는 건 기술이 아니라, 그 사람이 품고 있는 '이야기'라고.
"IMDb에 제 이름 세 글자가 새겨진 것처럼, 앞으로도 AI라는 붓으로 인간애라는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 남고 싶습니다.”
AI 시대, 기술은 이제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완도의 섬마을 이야기로 뉴욕과 도쿄를 울린 것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었다. 허 감독은 증명했다. '진짜 감독'은 단지 버튼을 누르는 게 아닌, 2천 번의 시행착오 끝에 단 하나의 진심을 건져 올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의 노트북 화면에는 렌더링 중인 수십여 개의 영상 파일이 깜빡이고 있었다. 다음 '1초'를 위한 또 한 번의 긴 밤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한국경제TV 박준식 기자
parkjs@wowtv.co.kr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