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동양여성 = 보모' 인식에 불쾌했다고?

입력 2017-03-21 07:30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동양여성 = 보모' 인식에 불쾌했다고?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1. 1960년 3월 21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금광 도시 샤프빌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흑인들에게 부족별로 일정한 지역에서만 거주하도록 하고 부족명·고용주 이름·지문 등이 표시된 증명서의 소지를 의무화한 통행법에 반대한 것이다. 수천 명이 경찰서에 몰려가 통행법 위반 단속에 항의하자 경찰은 자동화기를 난사해 69명이 숨지고 186명이 다쳤다. 이를 '샤프빌의 학살'이라고 부른다.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을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하자 정부는 계엄령을 발동해 흑인운동 단체를 불법화하고 2만여 명을 투옥했다. 그러나 이는 비폭력 저항운동을 펼치던 흑인들을 무장투쟁으로 내몰고, 흑백분리 정책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지탄을 불렀다. 넬슨 만델라도 무장조직을 결성해 싸우다가 1962년 8월 수감돼 무려 27년을 감옥에서 지내게 된다. 유엔은 1960년 4월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 아파르트헤이트 중지를 촉구했으며, 1966년 총회에서 3월 21일을 국제 인종차별 철폐의 날로 선포했다.


#2. 1976년 6월 16일, 남아공 흑인 빈민 지역 소웨토의 광장에 수만 명이 몰려들었다. 흑인에게 네덜란드계 이주민의 후손이 써오던 아프리칸스어를 배울 것을 의무화하자 들고일어난 것이다. 투석전이 벌어졌고 경찰의 발포로 6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이 가운데는 12세 소년 헥터 피터슨도 있었는데, 헥터 옆에서 오열하는 누나의 사진이 각국 신문에 실려 남아공 국민은 물론 전 인류를 격분시켰다. '소웨토 봉기'의 시작이다. 성난 흑인들은 경찰서와 자동차를 불태웠고 시위의 물결은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유엔 안보리는 남아공 정부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유엔 총회도 남아공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무력 사용을 지지한 데 이어 경제·외교 봉쇄운동을 벌일 것을 결의했다. 남아공 정부는 9개월간의 봉기로 575명이 죽었다고 발표했으나 실제로는 이를 훨씬 웃돌았다. 1991년 아프리카단결기구(OAU)는 6월 16일을 '아프리카 어린이날'로 지정했다.




#3, 1892년 6월 7일, 미국 뉴올리언스의 혼혈 흑인 호머 플레시가 백인 열차 칸에 앉자 차장은 유색인종 칸으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1890년 루이지애나주가 제정한 '열차분리법'에 따른 것이었다. 이를 거부한 플레시는 체포돼 기소됐다. 플레시의 변호인단은 흑인에게 모멸감을 주는 열차분리법이 '어떤 주도 법률에 의한 주민의 평등한 보호를 거부하지 못한다'는 수정헌법 14조를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1896년 5월 18일 연방대법원은 "분리하되 평등하면 된다"며 합헌 판결을 내렸다.


#4. 1951년 미국 캔자스주 토피카에 사는 8살 흑인 소녀 린다 브라운은 집에서 가까운 초등학교를 놔두고 1.6㎞나 떨어진 흑인학교를 걸어 다녀야 했다. 린다의 아버지는 전학 신청이 거절되자 소송을 냈다가 1심과 2심에서 모두 패소했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은 1954년 5월 17일 전원일치로 "공립학교의 흑백분리는 불평등하다"고 판결했다. 플레시 사건의 판결이 58년 만에 뒤집힌 것이다.




#5. 2017년 2월 2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89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 진행자 지미 키멀은 "지난해 오스카상이 인종차별적이었다는 얘기가 나왔다가 올해 쑥 들어간 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덕분"이라고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 트럼프의 반이민정책과 인종차별적 발언들이 반작용을 불러와 아카데미상이 '백인들만의 잔치'라는 오명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이날 흑인 소년의 성장기를 담은 '문라이트'가 작품상과 각색상 등의 영예를 안았고 남우조연상의 마허샬라 알리가 흑인 무슬림 1호 수상자가 됐다.



#6.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한 지난 10일, 사이버공간에서는 '깜짝 스타'가 탄생했다. 백인인 로버트 켈리 부산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박 대통령 탄핵 결정에 관해 집에서 영국 BBC의 영상 인터뷰에 응하던 중 두 아이가 차례로 방에 들어와 방해하는 '사고'가 생중계돼 화제를 모았다. 이 영상은 SNS로 퍼져 조회 수 1억 회를 넘겼고, KBS 2TV '개그 콘서트' 등에서 숱한 패러디를 양산하고 있다. 이 유쾌한 해프닝이 우리에게는 불쾌감도 안겨주었다. 황급히 들어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간 한국인 아내를 일부 서구 언론과 네티즌이 '보모'라고 표현해 인종차별 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아내 김정아 씨는 "과거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 솔직히 기분이 아주 나쁘지는 않았고 오히려 이해할 수 있었다"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으나 오히려 그 말이 "백인 가정의 동양 여성은 보모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편견이 만연해 있음을 확인시켰다.




#6. 이주공동행동과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등은 19일 오후 서울 보신각 앞에서 국제 인종차별 철폐의 날 기념대회를 열었다. 네팔 출신의 우다야 라이 이주노조 위원장은 "유엔이 인종차별 철폐의 날을 선포한 지 50년이 지났지만 한국 사회의 이주노동자 차별은 오히려 심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200여 명의 참가자는 '인종차별과 혐오 OUT!', '차별금지법 제정', '이주노동자는 일회용품이 아니다', 'No to Racism, No to Trump' 등이 적힌 피켓을 들고 '인종차별 정책을 멈춰라', '고용허가제를 폐지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들은 퍼포먼스와 각국의 전통 공연을 마친 뒤 서울고용노동청을 거쳐 국가인권위원회까지 행진했다.



인종차별에 관한 한 우리 민족은 피해자이자 가해자다. 1세기 전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백인 농장주들의 멸시를 참아가며 일하던 노동자의 후손들이 지금은 국내에서 동남아 출신 노동자들을 비닐하우스나 컨테이너에 묵게 하며 힘들고 더럽고 어려운 일을 시키고 있다. 프로축구 K리그에서 뛰는 흑인 선수가 '깜둥이'라는 야유를 받을 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손흥민 선수는 원숭이 울음을 흉내 내는 관중의 모욕을 견디고 있다. 미국과 남아공의 흑인 민권운동사에 공감하거나 한국인 여성의 보모 취급에 분개하지만 말고 우리의 행동과 마음 안에 드리운 인종차별의 그늘을 먼저 걷어내야 한다.



hee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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