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주의 시선] '월하의 맹서'와 한국영화 100년

입력 2017-04-06 07:31  

[김은주의 시선] '월하의 맹서'와 한국영화 100년

(서울=연합뉴스) "체신국에서는 저금 사상을 선전하기 위하여 저금 활동사진을 영사하던 중 재작일 밤에 시내 경성호텔에서 각 신문통신사 기자와 관계자 백여명을 초대하여 그 필름의 시험영사를 하였는 바 각본은 윤백남 군이 만든 월하의 맹서라는 이천 척의 긴 사진으로 내용이 매우 잘 되어 크게 갈채를 받았으며 그 필름은 경성을 비롯하여 각 지방으로 가지고 다니며 저금을 선전할 터이라더라." (동아일보 1923. 4. 11)

언론에 실린 '저금 사진 시영'이라는 제목의 기사 전문이다.

1923년 4월9일 경성호텔에서는 영화 '월하의 맹서' 시사회가 열렸다.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저축을 장려하기 위해 기획·제작한 계몽영화였다. 이날 시사회에는 기자와 각계각층의 저명인사 100여명이 초청됐다.

이 영화가 우리나라 최초의 극영화이다. 이 영화는 본격적인 영화 형식을 갖추었다. 줄거리와 주연배우가 있었고 처음으로 실제 여배우가 출연했다. 당시에는 극영화가 아닌 연쇄극이라는 형식의 영화가 상영됐다. 연쇄극에는 여성이 직접 출연하지 않고 남자배우를 여자로 분장시켜 연기하도록 했다. '월하의 맹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인이 직접 만든 최초의 영화이기도 했다. 시나리오와 연출은 물론 배우들까지 한국인이 참여했다.


줄거리는 단순했다. 서울에서 학업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영득(권일청 분)이 불량배들과 어울리며 주색잡기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빚을 지게 된다. 약혼녀 정순(이월화 분)은 이런 영득을 정성으로 어우른다. 노름방에서 몰매를 맞고 사경을 헤매던 영득은 정순의 간호로 건강을 되찾는다. 정순의 아버지는 그동안 푼돈을 모아 저축해둔 돈으로 영득의 빚을 갚아주고 영득은 비로소 저축의 고마움을 깨닫게 된다. 영득은 정순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두 사람은 어느 달 밝은 밤에 앞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며 저축을 할 것을 맹세한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는 윤백남이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했다. 윤백남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집필해 우리 영화사에서 최초의 시나리오 작가가 됐다. 이전의 연쇄극은 연극 대본을 바탕으로 했다. 이 영화는 35㎜ 필름으로 제작됐으며 권일청·이월화가 주연을 맡았다. 2권 2천자라는 기록으로 보아 러닝타임은 33분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극장에서 개봉되지는 않았다. 1년 정도 서울과 경기도 일대 공공기관에서 상영된 후 1924년 2월부터 지방 순회 상영을 했다.

윤백남은 연극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888년 충남 공주 출생으로 경성학당 중학부를 마치고 조선 황실의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고등예과를 거쳐 정경과로 진학했다. 그러나 정경과 학생에게 관비 지원이 중단되자 도쿄고등상업학교로 전학해 졸업했다. 귀국 후 매일신보에 들어가 1913년 매일신보 편집국장이 됐고 후에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1919년 한국 최초의 대중소설인 '대도전'을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그는 1912년 신파극단 문수성, 1916년 예성좌를 조직했고 1922년에 민중극단을 설립해 자신이 쓴 희곡 '등대지기', '기연', '제야의 종소리' 등과 번안·번역극을 무대에 올렸다.

'월하의 맹서' 이후 조선키네마에 입사해 '운영전'을 감독했고 1925년 윤백남프로덕션을 만들어 '심청전'을 제작했다. 그는 1931년 창립된 신극 단체 극예술연구회의 창립동인이었다. 1934년 만주로 건너가 역사소설 '낙조의 노래', '미수' 등을 집필했으며 해방 후 귀국해 1953년 서라벌예술대학 학장, 1954년 초대 예술원 회원을 역임했다.

그는 '월하의 맹서'에 민중극단 단원 15명을 출연시켰다. 이월화도 그중 하나였다.

이월화는 초창기 신극 여배우이며 최초의 영화 여배우이다. 조선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1904년 서울에서 태어나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이화학당을 다니다가 신파극단 신극좌에 들어갔다. 1922년 민중극단으로 옮겨 '영겁의 처' 등에서 주연을 맡아 인기를 누렸다. 1923년 토월회가 등장하자 주연으로 발탁되어 '부활' 등에 출연했다. 본명은 정숙이며 월화는 윤백남이 지어준 예명이다.

이후 영화로 활동무대를 옮겨 '월하의 맹서', '해의 비곡' 등에 출연해 스타가 됐으나 신진들에게 밀리게 되자 연예계를 떠났다. 1929년 여배우들로만 구성된 오양가극단을 창단해 운영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1933년 7월18일 일본을 거쳐 상하이로 가던 중 29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월하의 맹서'의 필름은 남아있지 않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극영화는 안종화 감독의 1934년 작 '청춘의 십자로'이다.


최초의 한국영화는 '의리적 구토'로 알려져 있다. 1919년 10월27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이 영화는 극영화가 아닌 연쇄극이다. 연쇄극이란 연극과 영화가 결합한 공연 방식으로, 연극 무대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야외장면이나 활극 장면을 영화로 찍어 연극 도중에 무대 위의 스크린에 영사했다. '의리적 구토'는 단성사 사장 박승필이 제작했으며 신극좌의 김도산이 감독·각본·주연을 맡았고 신극좌 단원들이 출연했다. 국내 기술진이 없어서 촬영과 편집은 일본인이 맡았다. 당시 한강철교, 장충단, 청량리, 남대문 등 서울 시내 곳곳을 배경으로 자동차, 전차, 기차 등 서구 신문물을 동원한 활극 장면이 등장한다.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고 이후 한동안 연쇄극이 유행했다. 이전에도 일본인 극단의 연쇄극이 상연됐으나 '의리적 구토'는 한국인의 자본과 연출로 제작된 것이다.

줄거리는 선친의 유산을 빼앗으려는 계모 일당의 괴롭힘을 받으며 살아가던 송산이라는 청년이 가문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죽산과 매초라는 친구들을 만나 사회악을 뿌리 뽑고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을 권유받아 계모 일당을 물리치고 평화를 찾는다는 내용이다.


'의리적 구토'는 완전한 극영화가 아니라는 점에서 '월하의 맹서'를 한국영화의 출발이라고 주장하는 영화사가들도 있다. 그러나 1962년 영화의 날 제정위원회는 '의리적 구토'를 한국영화 제1호로 정하고 10월27일을 영화의 날로 선포했다.

영화계는 '의리적 구토' 개봉 시점을 기준으로 2019년을 한국영화 100년으로 잡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상자료원이 합동 추진단 만들어 행사를 준비한다.

100년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고 즐거움을 안겨주었던 한국영화. 그동안 한국영화는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고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지난해 국내 영화시장에서 한국영화 총관객 수는 1억1천655만명으로 전년 대비 3.2% 증가했다. 관객 점유율은 한국영화가 54%였다. 한국영화의 수출도 활발하다. 지난해 한국영화 수출 실적은 1억109만달러로 전년 대비 82.1% 늘어났다. 주요 국제영화제에서 수상도 이어지고 있다.

우수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와 더불어 주요 작품들과 영화 관련 자료들의 보존도 적극적으로 추진돼야 한다. '의리적 구토', '월하의 맹서' 모두 필름을 찾을 수 없다.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중요한 작품들에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지난해 5월 문을 연 한국영상자료원 파주보존센터는 한국영화 보존·복원 전문시설로, 디지털 복원에 필요한 첨단장비를 구축했다. 고 유현목 감독의 1961년 작 '오발탄'의 디지털 복원본을 공개하는 등 영화사에 길이 남을 한국 고전 영화들의 디지털 복원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1년에 40편 정도를 복원하고 있으나 인력과 예산 면에서 여전히 아쉬운 점이 많다. 과거의 작품들은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되어왔다. 어느 분야에서나 역사를 보존하는 것은 중요하다. 100년의 역사를 바라보는 한국영화도 마찬가지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kej@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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