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T "미국 기준 규제 있었다면 막을 수 있었다"
英매체, 노동·보수당 정부 '친기업적 규제완화 매몰' 비판
"런던 참사는 '정치는 일상과 무관' 믿음 깨 …안전이냐 비용이냐 선택은 정치적"
(서울=연합뉴스) 윤동영 기자 = 사망자가 80명으로까지 늘어난 영국 그렌펠 타워 화재 참사 배경엔 보수당 정부는 물론 노동당 정부도 영국 안팎에서 계속 나온 안전 위험 경고를 무시한 채 '친기업적 규제 완화' 정책에 매몰됐던 게 자리 잡고 있다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다.
참사 초기엔 냉장고와 외장재, 그리고 이들 제품의 제조사들이 '범인'으로 우선 지목받았다.
미국 월풀사의 핫포인트 냉장고는 뒤판이 가연성 플라스틱으로 돼 있어서 발화점 역할을 했고, 미국 아코닉사의 외장재는 알루미늄판 내부에 가연성 폴리틸렌이 들어 있는 데다 외장재와 건물 외벽 사이의 작은 틈까지 화염을 수직으로 빠르게 번지게 하는 굴뚝 역할을 했다.
경찰의 수사와 함께 인명을 중시하는 선진국으로 자부해온 나라에서 이런 후진적인 참사가 일어난 근원에 대한 성찰이 시작되면서 영국과 미국 언론에선 시민 안전분야에서까지 기업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규제 완화를 지고한 가치로 내세워온 정치권을 향한 비판이 매서워지고 있다.
영국 매체들에 따르면 궁지에 몰린 정치권은 서로 상대 당에 손가락질하는 익숙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노동당 제러미 코빈 대표가 화재안전 인력 감축 등을 초래한 보수당 정권 때 긴축 정책이 이번 참사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비난하자 테리사 메이 총리는 발끈하며 노동당의 블레어 총리정권 때부터 화재안전 규제가 완화됐다고 책임을 넘겼다.
노동당 측이 "지난 수십 년간 정치인들이 해온" 정책 결정들이 피해자들을 죽인 셈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 보수당 측은 "참사를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고 반박하는 장면도 낯설지 않다.
이런 논쟁에 대해 가디언의 칼럼니스트 수전 무어는 26일(현지시간) "그렌펠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라고 단언했다.
"우파가 그렌펠 참사의 정치화를 차단하려 하고 있지만, 양당의 '기업 친화적인' 정치인들이 내린 결정들로 인해 그렌펠 타워 같은 주거 건물들이 가연성 외장재를 두르게 됐고, 시장은 그런 외장재를 공급하기 바빴다"는 것이다.
무어는 "이번 참사는 정치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무관하다는 믿음을 깨버리는 역할을 했다"며 "그렌펠의 정치화는 정치인들에 의해 이뤄지는 게 아니라, 많은 생명을 구하는 것보다는 몇천 파운드를 아끼는 것을 우선시하는 게 정치적 선택이었음을 목격한 아래로부터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디펜던트의 비즈니스 분야 수석 평론가인 제임스 무어도 28일 '규제와 관료주의가 필요한 때도 있다'는 기사에서 "보건과 안전에 관한 규제가 종종 조롱당하지만, 사실은 필수불가결의 요소"라며 "규제와 규제 관리들이 앞으로도 절대 인기를 얻는 일은 없겠지만…필요하다"고 말했다.
연구·학계의 논문들을 게재하는 비영리 매체인 더 컨버세이션엔 28일 "더 이상 규제라는 말이 더러운 단어인 것처럼 취급돼선 안 된다"며 메이 총리도 이번 참사를 "국가의 실패"라고 규정한 만큼, "그렌펠 화재 참사에서 드러난 긴축, 규제 철폐, (규제의) 민간 위임 등의 중요한 문제들"을 돌아볼 때라는 주장이 실렸다.
특히 미국의 뉴욕타임스도 임차인, 건축업계 임원과 화재안전 관계자 등을 두루 인터뷰한 결과 "정부 감독의 총체적 실패, 영국 내부와 세계 각지에서 전해진 경고에 대한 무시, 보수당과 노동당 가릴 것 없이 기업들을 안전 규제로부터 해방해 주려는 정부 정책들"이 문제로 드러나고 있다면서 이틀에 걸쳐 집중적으로 다뤘다.
"미국 수준의 안전 규제가 있었다면 그렌펠 화재 피해를 줄였거나 혹은 아예 화재가 그렇게 번지지도 않았을 것"인데, 영국에선 "친기업적인 정치인들이 (기업들의) 비용 우려를 가연성 외장재의 위험보다 중시했고, 건설업자들은 수백 채의 고층 아파트 건물들을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불에 잘 타는 자재로 둘둘 감싸도록 허용됐고, 가연성 자재 제조업자들은 거리낌 없이 영국 시장에 자재를 내다 팔았다"고 이 매체는 개탄했다.
미국 역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규제 하나를 신설할 때마다 기존 규제 2건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하는 등 규제 완화 기조인 것은 사실이지만, 식품과 의약품을 비롯한 소비재에 관한 미국의 규정은 각종 소송과 보험업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뉴욕타임스는 설명했다.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의 화재방지 규정 모델을 만드는 전국화재방지협회(NFPA)에 보험사들이 공동으로 출연하는 식이다. 건축업계의 규제 완화 로비에 대한 견제 세력이 작동하는 셈이다.
▲미국과 영국 간 화재안전 규제 차이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알루미늄판 내부를 순수 폴리틸렌으로 채운 외장재는 미국에선 안전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이미 20년 전부터 일정한 높이 이상의 건물에 사용이 금지됐다. "미국의 이런 조치에 영향을 받아 세계의 다른 많은 나라도 미국의 선례를 따랐으나, 영국은 아니었다"고 이 신문은 지적했다.
미국 규제 당국은 1998년부터 2단 사다리차가 닿지 못하는 높이의 건물에 사용되는 건축 자재들에 대해선 모두 실제 공법대로 설치한 상태에서 화재 모의시험을 하도록 의무화했다. 그렌펠 타워의 알루미늄 외장재는 이 시험에 모두 불합격했다. 이에 제조사들은 난연성 차단재로 보완해 보기도 했으나 실제 상황에선 효과가 없는 것으로 시험 결과 나타났다.
월풀 냉장고의 경우도 미국에서 판매되는 제품들은 뒤판까지 금속으로 돼 있으나 영국에서 판매된 제품은 플라스틱으로 돼 있어 화재 위험에 취약했다. 월풀사는 플라스틱 뒤판에 대해 "업계에서 모두 사용하는 종류의 플라스틱"이라며 규격에 따랐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의 냉장고 화재 사건을 비교한 최근 한 결과에 따르면, 냉장고 화재 발생 비율은 두 나라가 비슷하고 영국이 미국보다 인구가 적은데도 냉장고 화재로 인한 사망자는 영국이 미국보다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를 한 런던 사우스뱅크대의 그래미 메이드멘트 교수는 "뒤판이 방화재냐 아니냐가 화재 안전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상식"이라고 말했다.
▲영국 정부의 규제 완화 '매몰'
영국 스코틀랜드 지방 어빈에서 1999년 14층짜리 공공주택 건물 화재를 계기로 화재안전 관계자들은 가연성 외장재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미국처럼 실제 화재 상황에서 건자재의 위험성 평가하도록 의무화할 것을 의회에 청원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제조업체들은 방화재 사용에 따른 각종 규정 변경과 비용 증가를 이유로 반대 입장을 의회에 전달했다.
"영국의 친기업적 정부들은, 처음엔 노동당 정부에서, 이어선 보수당 정부에서 규제 완화를 내세워" '신설 규제 한 건마다 기존 규제 최소 한 건의 철폐'를 구호로 삼았다. 2005년 건물 화재안전 감독의 건물주 자율 위임도 이렇게 이뤄졌다.
2014년엔 미국의 화재방지연구재단(FPRF)이 외장재 관련 세계 주요 고층건물의 화재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냈는데, 프랑스, 두바이, 한국(2010년 부산 해운대 38층짜리 우신골든스위트 화재), 미국 등 최소 6건에서 그렌펠 타워와 같은 외장재가 사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엔 영국 의회 일부 여야 의원들이 공동으로 자동 스프링클러와 외장재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토록 정부에 촉구했다.
이외에도 2014년 호주 멜버른 화재와 2015년 두바이에서 2건의 초고층 건물 화재 등을 통해 가연성 외장재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잇따랐음에도 "영국에선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고 뉴욕타임스는 말했다. "건설업계의 로비가 안전업계의 로비보다 훨씬 강하고 목소리가 크다"는 것이다.
냉장고 역시, 런던 소방대가 오래전부터 뒤판이 플라스틱으로 된 냉장고의 판매 금지 운동을 벌여왔다. 지난 2월엔 뒤판이 각각 금속과 플라스틱으로 된 냉장고에 불이 났을 때 손상도를 비교하는 비디오를 웹사이트에 올리고 "앞문과 양옆은 금속으로 돼 있지만, 뒤판은 플라스틱으로 된 냉장고가 아직 많이 사용되고 있다"며 플라스틱 뒤판의 위험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덧붙인 성명에서 소방대는 "5년 동안이나 전면적으로 방화재 뒤판을 사용토록 하자고 로비를 벌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다"고 개탄했다.
yd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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