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70주년] ① 국가폭력의 비극…제주에 스러진 동백꽃 수만 송이

입력 2018-03-30 06:11   수정 2018-03-30 09:26

[4·3 70주년] ① 국가폭력의 비극…제주에 스러진 동백꽃 수만 송이

2만5천∼3만명 희생 추정…'금기 반세기' 후 90년대 말 진상규명 시작
국가기념일·지방공휴일 지정했지만 특별법 개정·재심 등 숙제 산적


[※ 편집자 주 = 제주4·3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았습니다. 해방 직후 이념충돌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주도 전체가 국가의 부당한 폭력이 빚은 핏빛으로 물들었습니다. 붉은 동백꽃이 제주4·3의 상징 꽃이 된 데에는 이런 아픈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지난 70년간 온갖 질곡 속에서 한 걸음씩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향해 나아간 제주4·3은 '완전한 해결'을 약속한 문재인 정부 들어 진실 찾기에 조금 더 다가가는 모습입니다. 동시에 화해·상생을 넘어 이제 평화와 인권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연합뉴스는 4·3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4편의 기사를 통해 살펴봅니다.]


(제주=연합뉴스) 전지혜 기자 = "이승만 정부는 군인과 경찰에 무장대를 더욱 강력하게 진압하라고 명령했어요. 바닷가에서 5㎞ 이상 떨어진 지역에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는 사람은 총살하겠다는 발표도 했어요. 이때부터 아무 잘못도 없는 수많은 도민이 산에 올라간 청년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희생당했지요." (제주도교육청 발간 초등학생용 4·3 평화인권교육 교재)
70년 전 해방정국 혼란기 속 제주에서는 국가 권력에 의한 무자비한 학살이 있었다.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컸던 참극인 바로 제주4·3이다.


4·3의 발단은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발생한 발포사건이었다. 가두시위 과정에서 어린아이가 경찰이 탄 말에 차여 다쳤음에도 기마 경찰이 그냥 지나치자 항의가 터져 나왔고, 경찰이 군중에게 총격을 가해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도민들은 이에 항의해 같은 달 10일 민관 총파업을 벌였다. 미군정은 파업 참여자 등을 잡아 가두기 시작했다. 여기에 육지의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대거 투입됐고 탄압은 더 거세졌다.
이런 가운데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대 350여명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응원 경찰 및 서북청년단 추방' 등을 외치며 도내 경찰지서 12곳을 습격하는 무장봉기가 발생했다.
그해 5월 10일 남한 단독으로 실시된 선거에서 제주도 2개 선거구가 기준 투표율에 미달해 무효 처리가 된 뒤로 군과 경찰은 더 강력한 진압에 나섰다. 같은 해 11월 17일에는 제주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1949년 1월 17일에는 군경토벌대가 조천면 북촌리 주민 400명가량을 집단 총살하고 마을을 모두 불태운 '북촌사건'이 일어났다. 마을 인근에서 군인이 기습받은 데 대한 보복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무장대의 보복 습격도 끊이지 않았다.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은 마을 주민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한국전쟁 발발 뒤로는 보도연맹 가입자나 입산자 가족 등을 잡아들인 뒤 집단 수장하거나 총살, 암매장하는 일이 잇따랐다.


1947년 3·1 발포사건 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출입금지가 해제될 때까지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지금까지 법적 정부기구인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의 인정을 받은 희생자는 1만4천232명(사망자 1만244명, 행방불명자 3천576명, 후유장애자 164명, 수형자 248명)이며, 유족은 5만9천426명이다.
2003년 발간된 정부의 4·3 진상 보고서는 "인구 동향 등의 자료를 고려하면 4·3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총 2만5천∼3만 명이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7년간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가량이 희생된 것이다.
그러나 국가 권력은 수십 년간 제주도민에게 4·3에 대한 침묵을 강요했고, 진실을 왜곡·은폐했다.
금기시되던 4·3을 세상에 알린 건 1978년 발표된 제주 출신 현기영 작가의 소설 '순이 삼촌'이다. 북촌리 집단학살 사건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4·3의 참혹함을 고스란히 그려냈다.
1989년에는 도내 사회단체 등으로 구성된 '사월제 공동준비위원회'가 첫 대중적 추모행사를 열었다.
제주도의회도 1993년 4·3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킨 후 피해 신고를 받아 1995년 5월 첫 보고서를 발간했다.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 노력이 본격화된 것은 1990년대 말부터다.
4·3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공약으로 내세운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 1999년 12월 16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002년에는 1천715명이 정부로부터 처음 4·3 희생자로 인정됐다.
2003년 10월 15일 4·3진상보고서가 확정되자 보름여 뒤인 31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를 찾아 "과거 국가 권력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사과를 했다.
노 대통령은 2006년 위령제에 대통령으로는 처음 참석해 직접 도민을 위로하기도 했다.


2013년에는 수십 년 동안 서로 등 돌리고 살아온 4·3유족회와 제주도재향경우회가 "우리는 모두 피해자다. 서로의 아픔을 함께 치유하겠다"며 손을 맞잡았다.
이듬해인 2014년 4·3 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돼 66주년 추념식이 처음으로 국가의례로 봉행됐다.
70주년 추념일을 2주가량 앞둔 이달 21일에는 정부가 제기한 형평성 논란에도 도의회의 의결로 4·3희생자추념일이 전국 최초로 지방공휴일로 지정됐다.
이런 가운데 정치권에서는 희생자 및 유족의 요구를 반영해 4·3 진상규명 의지를 더 강화하고 피해자나 생존자들에 대한 배·보상 범위를 확대하는 특별법 개정 움직임도 본격화하고 있다.
또 일부 수형 희생자들이 불법적 군사재판으로 인한 '전과자 낙인'을 무효로 해달라며 청구한 재심도 진행 중이다.
아름다운 제주의 아픈 역사가 남긴 숙제는 아직도 완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atoz@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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