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환이 쓴 택리지에 '함흥차사' 고사는 없다

입력 2018-10-24 10:52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 '함흥차사' 고사는 없다
안대회 교수, 이본 200여종 분석해 '완역 정본' 출간
"이전에는 1912년 광문회본 참고…택리지는 명저 중 명저"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남인 명문가 출신 문인 청담(淸潭) 이중환(1690∼1756)이 쓴 '택리지'(擇里志) 정본(定本)이 처음으로 번역·출간됐다.
청담이 1751년에 집필한 택리지는 국토 지리 현상을 총체적으로 다룬 인문지리학 명저. 많은 사람과 기관이 필사하거나 간행해 내용에 차이가 있는 이본(異本)이 200여 종이나 존재한다.
그러나 저자가 남긴 마지막 수정본이 전하지 않아 지금까지 번역된 택리지는 대부분 1912년 조선광문회가 펴낸 최남선 편집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이른바 '광문회본'은 수많은 택리지 이본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만, 이 책이 기준점 역할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문학자인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가 현존하는 택리지 이본을 검토해 선본(善本) 23종을 뽑은 뒤 여러 판본을 대조해 차이 나는 부분을 바로잡는 교감(校勘)을 거쳐 원본에 가장 가까운 정본을 확정했다.
출판사 휴머니스트가 간행한 '완역 정본 택리지'는 안 교수가 연구자 김보성·김세호·임영걸·임영길·김경희·이도훈·안현·이승용·김종민 씨와 함께 택리지 정본화를 위해 2012년 학술세미나를 시작한 이후 6년 만에 내놓은 성과물이다.
안 교수는 24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많은 택리지 번역서에는 태조 이성계를 모시러 함경도 함흥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사신을 가리키는 함흥차사 고사가 등장하지만, 이본 대부분에는 함흥차사 관련 내용이 없다"며 "함흥차사 고사는 택리지 이본 중 '등람'(登覽)에만 있다"고 말했다.
그는 "몰락한 양반인 이중환은 조정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이어서 태조와 태종의 갈등 관계를 담은 함흥차사 이야기를 싣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며 "함흥차사 고사를 넣으면 구성에서 균형이 깨지는 측면도 있다"고 덧붙였다.



안 교수는 해제에서 이중환이 1751년 택리지 초고를 발표한 뒤 지인에게서 서문과 발문을 받고, 내용을 수정해 1756년 사망하기 전 개정본을 냈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책 제목도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뜻하는 '사대부가거처'(士大夫可居處)에서 택리지로 바뀌었다.
초고본과 개정본 사이에는 차이가 분명하다. 예컨대 '복거론'(卜居論) 지리(地理)에서 초고본은 "주택의 좌향(坐向)은 또 모름지기 흘러오는 물과 더불어 정음(淨陰) 정양(淨陽)의 방법과 부합해야 비로소 순수하게 좋다"고 했지만, 개정본에는 "비록 산속이라도 또한 시냇물이 모여들면 대를 이어 오랫동안 살 만한 거주지가 된다"고 적었다.
안 교수는 "초고본과 개정본은 논의한 주제가 같아도 제시한 근거와 서술 방향이 다른 경우가 있다"며 "개정본은 내용이 더 풍부해지고 논리가 정연해졌으며, 풍수나 지리 현상에 대한 설명을 줄이는 대신 인문적 요소를 더하고 합리적 서술을 강화했다"고 평가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택리지가 세상에 나온 이후 인기가 높아 초고본부터 널리 필사됐고, 이로 인해 더욱 다양한 이본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필사자마다 추가하고 삭제한 부분이 달라 동일한 이본이 거의 없을 정도라고 안 교수는 강조했다.
그는 "조선 후기 저작 중에 이렇게 이본이 많은 책은 없다"며 "정본은 지은이가 직접 개정한 텍스트를 기준으로 했다"고 말했다.
완역 정본 택리지는 기존 번역본과 구성이 다르다. 광문회본은 사민총론·팔도총론·복거총론·총론·저자 후발로 이뤄졌는데, 정본은 서론·팔도론·복거론·결론·저자 후발 순으로 변경했다. 발문은 홍중인, 홍귀범, 정약용, 정인보가 지었다.
안 교수는 이중환이 택리지를 쓴 동기와 특징에 대해서도 논했다.
그는 청담이 당파 싸움에서 밀려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사대부였다고 지적하면서 지식인의 자기표현 욕구, 실존적 위기, 지리와 경제에 대한 관심, 국토 유람과 산수유람 취향, 귀천과 차별이 완화된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작용해 택리지를 서술했다고 추정했다.
이어 "택리지는 관(官)이 아니라 특정 학자의 개성이 담긴 저술로, 지리를 창의적으로 해석하고 독특한 시각을 드러냈다"며 "이중환은 지리 정보를 나열하거나 바로잡기보다는 지리적 현상을 논리를 갖춰 설명하고 해석하는 평론가 같은 태도를 보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전국 각지에 분포하는 구비전설을 적극적으로 채록한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며 "20세기 이전에 가장 오래되고 신뢰할 만한 구비문학 보고이자 명저 중의 명저"라고 강조했다.
지난 1월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60주년 학술회의에서 정본화는 고전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지름길일 뿐만 아니라 번역과 연구의 기초를 다지는 작업이라고 강조한 안 교수는 "우리 학계가 이제야 학술적으로 신뢰할 만한 택리지를 소유했다고 자부한다"고 역설했다.
책은 양장본과 보급판 2종으로 나왔다. 내용은 동일하나, 양장본에만 교감을 거친 원문과 주석 700여 개를 싣고, 도판을 풍부하게 수록했다.
양장본 560쪽, 3만5천원. 보급판 328쪽, 1만6천원.



psh59@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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