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미국, 총기 난사, 그리고 라이너스의 담요

입력 2021-03-28 07:07  

[특파원 시선] 미국, 총기 난사, 그리고 라이너스의 담요
총기참사 뒤 규제 여론 높아지자 총기업계는 호황 대비하는 미국의 역설
독립·개척의 역사 함께 해온 총기, 미국인에 안도감 주는 물건이라지만…


(샌프란시스코=연합뉴스) 정성호 특파원 = 잊을 만하면 터지는 대형 총기 참사는 미국의 대표적 치부다.
미 앨라배마대학의 테러리즘·범죄 부교수 애덤 랭크퍼드가 2016년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1966∼2012년 전 세계적으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의 약 3분의 1(292건 중 90건)이 미국에서 일어났다.
랭크퍼드 부교수는 총기 난사를 조직폭력배나 조직적인 테러리스트가 아닌 개인이 공공장소에서 저질러 4명 이상이 숨진 총기 폭력 사건으로 규정했다.
또 일간 워싱턴포스트(WP)가 운영하는 데이터베이스를 보면 1966년 이후 미국에서는 지금까지 183건의 총기 난사가 발생했다. 단독 총격범에 의해 4명 이상이 숨진 사건이 대상으로, 강도나 가정폭력 사건 등은 제외했다.
최근 1주일 간격을 두고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마사지숍과 콜로라도주 볼더의 식료품점에서 연달아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은 이런 긴 목록에 가장 최근 편입된 사건이다.
자신의 일터에서 일하다가, 또는 가족과 함께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가, 또는 생필품을 사러 슈퍼마켓에 갔다가 끔찍한 테러에 가족과 영원한 이별을 한 희생자들을 보며 미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총기 규제 강화에 대한 요구가 높다.
그런데 미국 언론 보도를 보다 보면 이런 기사들의 틈바구니에서 미국 사회의 희한한 역설을 짚어주는 기사와 마주치게 된다. 총기 규제 여론으로 총기 업계가 호황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WP는 25일자 기사에서 미국의 최대 총기 제조사 중 하나인 루거가 2019년 부진한 실적으로 위기에 놓여 있었다고 전했다. 3년 새 이익은 반 토막 났고 공장들은 며칠씩 문을 닫았다. 그렇게 많은 총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2020년 반전이 찾아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터졌고,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며 인종차별 반대 시위를 벌였다. 상점 약탈, 방화, 폭력도 뒤따라왔다.
그러자 미국의 총기 판매는 지난해 전년보다 60% 급등하며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루거의 최고경영자(CEO) 크리스 킬로이는 지난달 실적 발표에서 지난해 판매 증대가 "역사적"이고 "맹렬했다"며 1년간 이어진 소란과 폭발적 판매 증대 사이에 연관관계가 있다고 말했다.
WP는 그러면서 조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이 새로운 총기 규제를 밀어붙임에 따라 최근의 이 2건의 총기 난사가 더 강한 총기 판매를 유발할 것 같다고 전망했다.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정치적 대응을 불러오고 이 대응은 더 많은 총기 수요를 유발해 향후 또 다른 총격 사건이 벌어질 잠재력을 높이는, 익숙한 악순환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것이다.
WP는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에 대한 공포와 불확실성은 오랫동안 총기 제조업자의 수익에 호재가 돼 왔다"고 짚었다.
총기 업계도 이런 의견에 동조한다. 이익단체인 전미사격스포츠재단(NSSF)의 대변인 마크 올리비아는 사람들이 위협을 느낄 때 총기를 산다며 이를 폭풍이 닥치기 전 우유와 빵, 휴지를 사재기하는 것에 비유했다.


민주당 소속인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재임 기간이 총기 판매가 꾸준히 증가한 시기로 기록된다는 것도 기묘한 역설이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어느 순간에라도 행정부에 명령해 미국인들의 총을 빼앗아갈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었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은 총기 제조업자에게 고난의 시기였다. 웰즐리대의 필립 레빈 교수는 "총기 규제에 대한 우려가 본질적으로 제로(0)였다"고 말했다.
전 세계적으로 민간의 총기 보급률이 가장 낮은 수준인 한국에서 미국인들의 이런 태도를 이해하기는 힘들다.
모든 문화가 그렇듯 미국의 독특한 총기 문화는 이 나라 고유한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치 과학자 로버트 스피처는 현대 미국의 독특한 총기 문화의 기반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건국 초기부터 만연해 있던 총기, 개인의 무기 소지와 미국의 독립·개척 역사 간의 긴밀한 연관성, 그리고 이런 개척자의 삶에서 총이 매우 긴요한 도구라는 신화가 그것이다.
독립전쟁 이전까지는 재정·인적 자원의 부족으로 정부가 정규군을 운영할 형편이 못 됐고, 그래서 민간인이 스스로를 지켜야 했던 자경주의 유산의 흔적을 오늘날 미국의 총기 문화에서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2015년 영국 BBC에서 방영한, 미국의 총격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촬영한 영국의 저명한 다큐 감독 어설라 맥팔레인은 당시 제작 과정의 후일담을 2017년 BBC에 기고했다.
맥팔레인은 여기서 다큐멘터리 촬영 과정에서 만난 미국인들의 이야기를 소개했는데 그중 두 사람의 발언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유년기 친구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19살 청년은 여러 정의 합법적 무기를 갖고 있고 총기에 전적으로 찬성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무기를 손에 쥐고 있으면 힘이 느껴져요. 마치 내가 그 무엇이든 다 막을 수 있을 것 같은."
또 친구가 말다툼하다 총에 맞아 숨졌다는 한 청년은 '총기에 대한 견해가 무엇이냐. 소지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한 번도 소지한 적이 없고 원한 적도 없지만 최근 친구 한 명이 죽고 나니 하나를 살까 한다고 답했다.
총격 사건의 희생자라면 총기 규제에 찬성할 것이란 기자의 통념은 산산조각 났다.


플로리다주립대에서 총기와 정신건강을 연구하는 벤저민 다우드-애로 교수는 "총은 라이너스의 담요와 거의 비슷하다"고 말했다.
라이너스의 담요는 국내엔 '스누피'란 이름으로 알려진 미국 만화 '피너츠'에 등장하는 캐릭터 라이너스가 항상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담요로, 그에게 마음의 평안과 안도감을 가져다주는 물건이다.
랭크퍼드 부교수는 2017년 CNN과 인터뷰에서 전 세계의 총기 난사 사건을 살펴본 결과 총기류에 대한 접근이 얼마나 수월한지가 총기 난사 사건을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 주요 지표라고 말했다.
1987∼1996년 사이 4건의 총기 난사 사건을 겪은 호주는 이후 총기 규제에 찬성하는 쪽으로 여론이 돌아섰고 규제를 강화했다. 호주의 총기 규제는 성공한 정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수백년 개척과 정복의 역사에서 가족의 생명과 집, 재산을 지키는 도구였던 총이 미국인들에게 라이너스의 담요인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불안을 달래주는 그 담요와의 고통스러운 결별 없이는 라이너스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없을 것 같다.
sisyph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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