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Eye] 한국인이 구조한 보트피플, 옥스퍼드대 한국 유물 살리다

입력 2022-03-20 07:00  

[런던 Eye] 한국인이 구조한 보트피플, 옥스퍼드대 한국 유물 살리다
보들리안 도서관 베트남계 사서, 10여년째 한국 유물 발굴
첫 한글판 성경ㆍ삼강행실도 등 지하 수장고서 찾아내…'한국의 보물들' 3권 작업


(옥스퍼드=연합뉴스) 최윤정 특파원 = 영국의 유서깊은 대학 옥스퍼드대에서 한국 관련 유물과 희귀도서 수천점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외국인이 있다.
옥스퍼드대 보들리안 도서관의 베트남계 사서 민청(Minh Chung·鍾仲明)씨는 10여년간 모래밭에서 보물을 찾듯이 지하 수장고에 묻혀있던 한국 유물들을 찾아내 세상에 내놨다.
삼강행실도, 영국 선교사 존 로스의 최초 한글판 성경 번역본(예수성교문답), 18세기 중반 사해 지도, 조선시대 투구 등 수많은 우리 유물이 그의 덕에 빛을 봤다.



영조의 장례 행렬을 그린 그림(영조 국장 발인 반차도), 고종을 위해 만든 해시계, 19세기 화살통, 은장도 등은 제대로 된 이름표를 달았다.
이렇게 발견된 유물과 희귀도서 중에 특히 노대영 주교(몬시뇰 러트)가 기증한 문법활용 사전 'Terminations of the verb 하다(1896)'는 세계 유일하고, 1884년에 기증된 면갑옷도 세트로는 몇 점 밖에 남아 있지 않다.

민청 사서는 19세기 후반부터 옥스퍼드대에 한국 관련 기증품이 들어왔는데 지하로 직행해서는 그대로 잊혔다고 말했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변화가 생긴 것은 2008년부터다. 보들리안 도서관이 외부 후원을 계기로 한국 소장품을 확대하면서 그의 명함에는 중국 뒤에 한국이 덧붙였다.
그는 1만5천권 뿐이던 한국 현대 출판물을 5만5천권으로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 희귀문서 수백권과 유물 수천점이 보관된 옥스퍼드대 도서관 100여곳과 박물관 4곳의 수장고까지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엔 한국 고문헌에 무척 흥미를 느꼈는데 그에 관한 세부 설명이 없길래 연구를 시작했다"며 "그러다가 얼마나 희귀하고 중요한 문헌들인지 깨달으며 관심이 더 깊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옥스퍼드대 박물관에서 한국의 훌륭한 유물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 눈에 들어왔고, 이를 최대한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며 "한국 역사는 독학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첫 성과가 2011년에 발간한 '한국의 보물들'(Korean treasures) 1권이다.
당시 보들리안 도서관에서 한 달간 전시회도 개최했다. 민청 사서는 "입구에서 했기 때문에 도서관에 들어가려면 전시를 봐야 했다"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2019년엔 2권을 내놨고 이제는 옥스퍼드대 약 40개 칼리지에 흩어진 유물을 찾고 새로운 기증품을 연구하면서 3권을 준비하고 있다.
각 칼리지에 한국 유물이 있는지 물어보고 방문해서 확인한 뒤 눈에 띄는 유물은 한국의 여러 연구자에게 물어가며 정체를 확인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옥스퍼드대 조지은 교수는 "민청 사서가 보들리안 도서관의 중국 센터와 한국 소장품을 함께 담당하는데 실제론 주로 한국 관련 일을 해서 우리 팀 같다"며 "한국 입장에선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 셈"이라고 귀띔했다.



민청 사서가 한국 유물을 발굴해낸 방식은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최근 옥스퍼드대에서 만났을 때 그는 손으로 들고 찍는 목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글자가 한글 'ㄷ' 같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아무래도 그림 속 모자가 우리 것이 아닌 것 같다는 말에 그는 삼강행실도에 비슷한 그림이 있다면서 구체적인 쪽수와 사진까지 내밀었다.
결국엔 기증자가 한국이 아니라 베트남에서 샀다고 출처를 수정하면서 수수께끼는 아쉬운 결말을 맞았다.

베트남 보트피플이었던 민청 사서와 한국의 인연은 꽤 길고 깊다.
그는 "작은 낚싯배에 26명이 타고 며칠간 바다를 떠돌던 중에 엔진이 고장 났는데 천우신조로 '골든돌핀호'에 구조됐다"고 털어놨다.
그는 "우리를 구해준 한국인 선장과 선원들은 내가 처음 만난 외국인이었고 배에서 지내는 동안 무척 친절하게 대해줬다"고 털어놨다. 그는 1977년 영국에 정착했다.
민청 사서는 한국 기증품이 계속 들어오는데 연구는 진척이 더디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전에는 단기 보조인력 등 지원이 있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중단됐다"고 토로했다. 도서관이 다른 나라 담당 사서들에게 제 2의 '한국의 보물들' 출간을 독려하면서 비용, 인력, 시간 지원을 몰아주는 역설적인 상황이라고 했다.
지금도 그의 사무실에는 선교사이자 번역가였던 제임스 게일의 미출판 원고와 노 주교가 게일의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 뭉치 등이 든 상자가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옥스팜이 기증한 한국전쟁 당시 활동 기록 사진과 서강대 안선재 명예교수가 보내기로 한 한국을 다룬 초기 영어책들도 살펴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민청 사서는 이제는 기증자가 영국의 다른 기관을 접촉해도 결국은 옥스퍼드대로 온다고 말했다.
조용석의 북계집 목판도 그런 경로로 들어왔다. 한 그래픽 디자이너가 영국의 고물상에서 발견하고 몇년 뒤 런던의 V&A 박물관과 영국 박물관에 판매를 문의했다가 결국 옥스퍼드대로 왔다.
민청 사서에게 가장 좋아하는 한국 유물에 관해 물으니 18세기 중반 제작된 안정복의 세계 지도 영고양계요동전도를 꼽았다. 지도 자체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이미 학자들이 바깥 세상 정세를 알고 있었다는 점이 드러나 있다고 했다.

그는 헤어지기 전 옥스퍼드대 핏리버스 박물관에 있는 한국 유물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설명해줬다.
면갑옷과 함께 있는 칼은 일본 것이고 가방은 정체불명인데 같이 기증돼서 이렇게 전시해둔 것 같다거나 한국 탈이라고 적힌 3점은 다들 일본 것 같다고 해서 책에선 제외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본 한국 책에 비슷하게 생긴 탈이 있던데 한국 탈일 가능성이 없을까요?" 그는 이렇게 한국 유물을 찾고 또 찾는다.
merciel@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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