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시선] "후손에 뿌리 알려주고파"…고려인 동포 분투에 관심 절실

입력 2023-04-01 07:07  

[특파원시선] "후손에 뿌리 알려주고파"…고려인 동포 분투에 관심 절실


(블라디보스토크=연합뉴스) 최수호 특파원 = "재정난을 해결할 방법이 없어 우선 유치원 운영부터 중단한다고 학부모들에게 알렸습니다. 이후 상황은 지켜봐야죠…"
1일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 김 발레리아(62) 교장은 기자와 통화에서 이같이 말했다.
앞서 지난달 10일 기자는 고려인 동포 후손들에 한글과 우리 전통문화 등을 가르치기 위해 최재형기념사업회 등 지원을 받아 2019년 9월 개교한 민족학교가 재정난에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사태 영향으로 국내 기관·단체 예산 지원과 한국인 방문객 후원금 등이 끊기면서 민족학교가 건물 임대료, 운영비, 교사 임금 등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학교의 안타까운 사정이 마음에 남아 '혹시나 좋은 소식이 있을까'하는 생각에 다시 연락했지만 기대와 달리 상황은 더욱 나빠져 있었다.
현재 학교 측은 예산이 거의 바닥 나 전통무용 실습실과 공연장, 한글 교실, 유치원 등이 있는 지상 2층 건물의 임대료(한 달 20만루블·330만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탓에 오는 5월 중순까지만 건물을 사용하고 밀린 두 달 치 임대료는 돈이 마련되는 대로 주기로 했다.
학교 측은 사용 만료가 예정된 날짜가 돌아오기 전까지 임대료로 낼 돈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성과는 없다.
이러한 불투명한 상황 탓에 학교 측은 우선 오는 5월 4일까지만 유치원을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김 발레리아 교장은 "학부모들이 시간을 갖고 대안을 찾을 수 있도록 유치원 폐쇄 방침을 미리 공지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건물 사용기간이 끝나는 5월 중순까지도 임대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나머지 학교 운영도 포기할 생각이다.
한때 유치원생을 포함해 민족학교에서 한글과 우리 전통 무용 등을 배우는 학생은 220여명에 달했지만, 지금은 70여명 정도만 남아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고려인 4·5세인 10대 학생들이다.
하지만 학교 측이 간신히 두세달 치 임대료를 구해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예산 대부분을 외부 지원에 의존하는 민족학교 특성상 이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예전처럼 한국 기관·단체와의 교류를 통해 안정적인 예산 지원책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학교는 언제든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김 발레리아 교장도 이런 사실을 잘 알기에 지난 2월부터 우리 교육부와 문화체육관광부, 국가보훈처, 지역별 교육청 등에 도움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지금까지 답변을 준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고 한다.
그는 "답장에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우크라이나 사태로 한국이 러시아 쪽을 도와주기가 어려운 상황이라 아예 답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우수리스크를 포함해 연해주 전역에는 고려인 동포 3만5천여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까닭에 비록 다른 도시에 살지만, 민족학교의 어려운 소식을 듣고 안타까움을 표하는 고려인 동포들도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는 고려인 3세 김 타냐(43)씨는 "현지 초·중·고등학교에 다니는 고려인 동포 후손들은 한국 역사만 따로 배울 기회가 좀처럼 없다"며 "대학에 진학하며 한국 관련 전공을 택해야만 한국에 대해 자세히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글과 한국 전통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사라진다면 고려인 동포 후손들이 자기 뿌리를 알 기회도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혹자는 1863년 연해주 이주에서 시작된 고려인 역사가 어느덧 16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그 후손들은 러시아에서 태어나 러시아 국적을 가진 까닭에 실상은 외국인과 다를 바 없지 않냐고 한다.
하지만 연해주 지역 고려인 사회에서는 자신들의 뿌리를 찾고 우리 전통문화를 배우며 이어가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보인다.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의 경우 추석 때마다 마을 곳곳에서 소규모로 열리곤 했던 축제를 통합해 2010년부터 해마다 한가위 대축제를 열고 있다.
이날 하루만이라도 고려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흥겹게 명절을 즐기고, 지역에 한국 전통문화도 알려보자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이 축제는 어느덧 입소문을 타고 연해주 전체에 퍼졌고, 지금은 고려인뿐만 아니라 현지 러시아인도 찾아 한국 문화를 즐긴다.
연해주 지역 고려인 동포 후손들이 한국을 찾아 전통문화를 배우는 교류 프로그램도 코로나19 이후 3년 만인 올해부터 재개됐다.
김 발레리아 교장은 민족학교 역시 재정 상황만 고려했을 때 10개월여 전에 이미 문을 닫았어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할 때까지 해보자"는 생각에 개인 돈을 들여가며 겨우겨우 버텼고, 중간중간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작년 10월 문화체육관광부가 세종문화상과 함께 수여한 상금 3천만원도 모두 임대료 지급에 사용했다.
김씨를 비롯한 교사 5명은 부족한 예산으로 임대료와 운영비를 충당하느라 제때 월급도 받지 못할 때도 많았다.
그는 "고려인 후손들은 러시아 국적을 갖고 있지만 생김새는 현지인들과 완전히 다르다"며 "이런 까닭에 완전한 러시아 사람도, 한국 사람도 아닌 게 현실이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까닭에 후손들에게 한글뿐만 아니라 자기 뿌리와 문화를 알려주고 싶었다"며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야만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김 발레리아 교장 역시 고려인 3세다.
이날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김 발레리아 교장은 학교가 정말로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현실에 가끔 목이 메기도 했다. 현재 진행형인 그의 '분투'에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다.

suh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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