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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시선] AI 전력난 시대 '슈뢰딩거의 전기요금'

입력 2026-03-08 07:07  

[특파원 시선] AI 전력난 시대 '슈뢰딩거의 전기요금'


(샌프란시스코=연합뉴스) 권영전 특파원 = "새로운 요금이 추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기 회사 '태평양 가스·전기'(PG&E)에서 보내온 공고를 별생각 없이 읽다가 굵은 글씨로 표시된 부분에 눈이 번뜩 뜨였다.
대개 이런 식으로 강변하는 문구는 거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경험이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강 일별하고 서랍에 던져두려던 생각을 고쳐먹고 처음부터 찬찬히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요컨대 이번 달부터 전기요금 체계가 바뀐다는 내용이었다.
"킬로와트시(㎾h)당 단가가 인하돼 고객님의 전기 비용 부담이 줄어듭니다"라는 반가운 문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계속 읽어 내려가니 "고객별 사용량이 다르므로 전기 요금 인하가 총청구액 인하로 이어질 수도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라는 아리송한 문장이 이어졌다.
마치 뚜껑을 열어보기 전엔 상자 속 고양이의 생사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양자역학의 유명한 사고실험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공지였다.
이런 문장에선 대체로 슬픈 예감이 틀리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요금체계 개편안의 전모를 파악해보니 전기요금 단가를 낮추는 대신 없던 '기본요금'이 신설된다는 게 이번 주요 골자였다.
결국 새로운 요금이 추가되는 게 아니라는 굵은 글씨는 역시 눈속임이었던 셈이다.
안내문은 기본요금에 전력망 연결을 위한 인프라 유지·보수, 에너지 프로그램 운영, 고객센터 서비스, 요금 청구 업무 등에 대한 비용이 포함돼 있다고 했다. 모두 기본요금이라는 게 생기기 전에도 당연히 있었던 업무다.
전기 회사는 이 비용이 지금껏 사용량당 요금에 녹아있었는데 이번에 분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기본요금은 24달러(약 3만5천원)다.
캘리포니아주 가정의 월평균 전기요금인 240∼260달러와 견주면 10% 수준밖에 안 되지만, 기를 쓰고 전기를 아껴 150달러 미만으로 요금을 방어해온 입장에서는 신경 쓰이는 고정비다.
사용량당 단가가 내려간다고 해도 인하 폭이 신설 기본요금을 상쇄할 것 같지는 않았다.
부아가 치밀지만 뾰족한 수는 없다. 북캘리포니아의 전력 공급은 PG&E가 독점하고 있으며, 설령 업체를 옮길 수 있더라도 결과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이번 요금 체계 개편은 전기 회사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라 주 정부와 의회가 주도한 공공정책이기 때문이다.
확인해 보니 남캘리포니아 지역 업체들인 '남캘리포니아 에디슨'(SCE)과 '샌디에이고 가스·전기'(SDG&E)도 같은 방식으로 요금체계를 바꿨거나 바꿀 예정이었다.
캘리포니아주는 이렇게 기본요금과 같은 고정비를 높이고 사용량 당 요금을 낮추면 주민들이 내연기관 차량 대신 전기차를 이용하고, 가스히터 대신 전열기를 사용할 거라고 기대한다.
이를 통해 화석연료 대신 탄소 배출이 없는 전기 에너지 이용 비율을 높일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개편은 결국 큰 주택에 살며 에너지 소비량이 많은 고소득층의 전기요금을 낮추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기본요금이 생기면 저소득층에 부담이 된다는 반발을 무마하려고 등록 저소득 가구에는 기본요금을 6∼12달러로 낮춰 적용하긴 한다.
결국 이 과정에서 저소득층도 고소득층도 아닌 '중산층'들이 높아진 요금을 고스란히 감내하게 된다.
기본요금을 신설하기로 한 법이 주 의회를 통과한 2022년까지만 해도 전기요금에 지금처럼 관심이 집중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캘리포니아는 물론 미 전역에서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가 소비하는 전기로 인한 전력난과 전기요금 인상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실제로 미국 에너지정보청(EIA)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미국의 소매 전기료는 1㎾h당 평균 17.24센트로 전년 동월 대비 6%나 올랐다. 특히 캘리포니아주의 전기요금은 34.71센트로 하와이를 제외하고는 미국 전체에서 가장 높다.
이런 상황에서 전기를 많이 쓰라고 장려하는 4년 전 요금 정책이 시행되는 상황은 얄궂다 못해 부조리한 느낌이다.

데이터센터로 인한 전기요금 인상은 미국에서 정치 의제로까지 부상하고 있다.
미국 내 데이터센터 밀집지 중 하나인 버지니아주에서는 지난해 11월 민주당 소속 애비게일 스팬버거 후보가 전기요금을 쟁점으로 삼은 캠페인을 벌여 주지사 선거에서 당선되기도 했다.
'전기 먹는 하마'로 인한 전력난과 전기요금 급증에 분노한 여론이 올해 치러질 중간선거에 악재가 된다는 사실을 의식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일 주요 거대 기술기업 경영진을 백악관으로 불러 모아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전기를 기업이 전적으로 부담하겠다는 '서약식'을 치르기까지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서약식을 "수많은 미국 가정에 역사적인 승리"라고 자평했지만, 진짜 승리한 것은 대통령인지 거대 기술기업인지 일반 미국 가정인지 아니면 누구인지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모호하기만 하다.
comma@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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