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당국 '정상방문 취소 카드' 배수진…EU 철강 쿼터 방어

입력 2026-07-11 09:01  

통상당국 '정상방문 취소 카드' 배수진…EU 철강 쿼터 방어

통상당국 '정상방문 취소 카드' 배수진…EU 철강 쿼터 방어
반토막 130만t 위기에서 207만t 확보…주요국 대비 선방
포스코·현대제철·세아그룹, 유럽 바이어 밀착 총력전


(서울=연합뉴스) 신창용 기자 = 한국이 유럽연합(EU)과 철강 담판에서 선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상외교 일정까지 협상의 지렛대로 삼는 정부의 '배수진'이 주효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숨을 돌린 국내 주요 철강 기업들은 정부가 지켜낸 무관세 쿼터를 발판 삼아 유럽 주요 고객사들과의 파트너십 강화에 나섰다.
11일 통상당국에 따르면 EU가 역내 철강산업 보호를 위해 이달부터 새 철강 수입 규제 조치를 시행한 가운데, 당초 EU 측이 한국에 배정하겠다고 통보한 무관세 쿼터는 130만t(톤)에 불과했다.
기존 무관세 쿼터(258.1만t) 대비 무려 49.6%가 급감한 수치로 한국산 철강 수출이 반토막 날 위기였다. 지난해 6월 미국이 철강 관세를 25%에서 50%로 올린 데 이어 유럽까지 빗장을 걸어 잠근 것이다.
이에 통상당국은 국내 철강업계가 받을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지난 4월부터 스위스 제네바와 벨기에 브뤼셀을 오가며 EU 측과 고위급·실무급 협상을 이어갔다.
여한구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은 마로시 셰프초비치 EU 통상·경제안보 집행위원과 4차례 만나며 끈질기게 협상을 벌였다.
돌파구는 지난달 10일 한·EU 정상회담이었다.
여 본부장은 "한국에 우호적인 무관세 쿼터가 보장되지 않을 경우, 이재명 대통령의 EU 방문 일정이 취소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EU 집행위원회에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직접 나섰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아프리카 출장이 예정돼 있던 셰프초비치 집행위원에게 출장을 취소하고 브뤼셀에 남아 한국과 협상을 타결하라고 지시했다.
한국은 EU를 설득할 논리가 충분했다. 한국은 EU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첫 번째 아시아 국가이자 중국·일본 등과는 달리 반덤핑 관세를 부과받은 적이 없는 '굿 플레이어'라는 점을 적극 부각했다.
현대차그룹의 완성차·부품 공장, SK온 등의 배터리 공장처럼 한국 기업은 이미 유럽 곳곳에 생산기지를 두고 있어 한국산 철강은 역내 산업 기반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EU 안에서 제조업 생산과 고용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치열한 협상 끝에 한국이 확보한 무관세 쿼터는 기존보다 19.7% 감소한 207.3만t으로 주요 철강 수출국 중 감소 폭이 가장 작은 축에 속했다.
지난해 세이프가드 8차 연도(2025년 6월∼2026년 7월) 기준 국가별 쿼터가 100만t 이상인 국가들의 감축률은 대부분 20% 후반에서 60% 후반 수준이었다.
튀르키예는 399.4만t에서 286.1만t으로 28.4%, 인도는 278.5만t에서 194.4만t으로 30.2% 각각 줄었다. 영국(66.6%), 우크라이나(58.9%), 스위스(67.5%)는 감소 폭이 더 컸다.
중국은 EU와 협상에 실패해 무관세 쿼터가 3분의 2 가까이 급감하며 직격탄을 맞았다.
여기에 후판·선재·STS열연 등이 새롭게 국가별 쿼터에 포함되면서 우리 주력 제품의 수출 기반도 지켜냈다.
거세지는 보호무역주의 흐름 속에서도 EU와 끈질기게 협상을 벌인 정부의 노력이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진 셈이다.
EU는 아세안에 이은 한국의 철강 수출 2위 시장이다. 무관세 쿼터가 절반 가까이 줄어들 것을 우려했던 국내 철강업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만 EU 시장은 단순히 국가 쿼터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생존하기 어려운 구조다.
일종의 탄소세인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올해부터 시행되면서 유럽 바이어들은 안정적인 철강 공급 능력뿐만 아니라 탄소 저감 기술까지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국내 주요 철강 기업들은 제품 경쟁력, 탄소 대응 역량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유럽 고객사와의 신뢰 다지기에 나섰다.
포스코는 이미 2020년부터 프랑스 완성차 업체 르노와 탄소 저감 판재의 중장기 생산 계획을 공유해왔다.
지난달 4일에는 경기도 용인에 있는 르노코리아 중앙연구소에서 '포스코-르노코리아 테크데이 2026' 행사를 공동 개최해 전동화·탈탄소 시대를 겨냥한 전략적 기술 협력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
현대제철은 최근 열린 월드랠리챔피언십(WRC) 그리스 랠리 기간에 유럽 주요 고객사를 초청해 세계 최초 '전기로-고로 복합 프로세스' 기반의 탄소 저감 강판 양산 체계를 소개했다.
유럽 바이어들의 탄소 감축 요구가 높아지는 가운데 차별화된 탄소 저감 강판 생산 능력을 중심으로 고객 기반을 더욱 넓혀나가겠다는 취지다.
세아그룹은 스페인, 독일 등 유럽 주요국 고객사들과 물량 협의 등 불확실한 통상 환경 극복을 위한 밀착 협의를 추진 중이다.
나아가 이달 말 영국에서 열리는 판버러 국제에어쇼 등 국제 행사 참가를 통해 유럽 주요 고객사들과의 접점을 확대해나갈 계획이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이번 협상 결과로 EU 시장에서 기존 거래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급변하는 통상환경 속에서 예측 가능한 수출 기반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며 "앞으로 쿼터 내에서 안정적으로 거래선을 확보하고 고객 맞춤형 대응을 강화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고 밝혔다.
chang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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