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프라우 과학기지] ① 알프스 관광명소, 알고 보니 100년 연구거점

입력 2026-08-16 13:10  

[융프라우 과학기지] ① 알프스 관광명소, 알고 보니 100년 연구거점

[융프라우 과학기지] ① 알프스 관광명소, 알고 보니 100년 연구거점
해발 3천500m서 온실가스·기후변화·우주선 입자 장기 관측
내년 GIST·베른대 장비 설치…57㎞ 양자통신 실증


(융프라우요흐<스위스>=연합뉴스) 조승한 기자 = 해발 3천454m. 지난달 19일 산악열차를 타고 유럽에서 가장 높은 기차역에 내리자 알프스 설산을 보기 위해 모여든 관광객들로 역 안이 붐볐다.
관광객들은 역을 지나 통로 중간 '국제고고도연구시설재단'(HFSJG)이라고 쓰인 분홍색 패널을 스치듯 지나 삼삼오오 융프라우를 직접 볼 수 있는 외부 전망대로 향했다.
하지만 그 옆 '관계자 외 출입금지' 팻말이 붙은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문 하나를 지나는 것만으로 관광객들의 설렘과 전혀 다른 조용한 공간이 펼쳐진 가운데 두꺼운 옷을 입은 채 연구 장비를 챙기던 연구자들이 인사를 건넸다.


◇ 철도 열리자마자 시작된 과학연구 논의…고산 연구거점으로
이날 찾은 융프라우요흐 연구소는 실험실만 있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산장 호텔을 닮은 아늑함이 느껴졌다.
내부에는 5개의 실험실과 연구실, 기계실 외에도 주방과 식당이 갖춰져 있었고 연구자를 위한 객실 10개도 정리돼 있었다.
객실 한편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연구자들이 노트북을 펼쳐 놓고 연구 결과를 정리하거나 다음 실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연구자들이 며칠에서 길게는 수 주 동안 머무르며 연구를 수행한다. 이를 지원하기 위해 두 쌍의 부부 관리인이 교대로 24시간 연구소를 지킨다.
융프라우요흐 연구소의 역사는 융프라우 철도가 개통된 1912년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고도 환경에 접근이 가능해지자 곧바로 연구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며 연구소 설립 논의도 시작됐고, 1931년 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실비오 데쿠르틴스 국제고고도연구시설재단 의장은 "융프라우 철도가 개통되면서 스위스 극지 탐험가 알프레드 드 케르방이 '이 특별한 고도에 접근할 수 있게 된 만큼 과학 연구를 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다"고 소개했다.

1937년에는 스핑크스 관측소가 완공되면서 융프라우요흐는 고산과 기후를 연구하는 주요 관측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연구소 복도에 걸린 칠판에는 이날 방문한 기자의 이름과 'EULIAA' 프로젝트 연구자들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EULIAA 프로젝트는 5~50㎞ 사이 대기 풍속과 기온을 라이다로 24시간 관측하는 프로젝트다. 연구자들은 장비의 헬기 이송을 앞두고 준비를 위해 분주한 모습이었다.
안내를 맡은 토마스 푸르터 관리인은 "대형 장비의 경우 대부분 헬기로 이송한다"고 설명했다.
회의실로 쓰이는 도서관에 들어서니 알레치 빙하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든 통창이 펼쳐졌다.

벽면 한편엔 1930년대부터 기상 기록 등을 수기로 써 둔 책들이 책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관광객들이 잠시 머물다 떠난 곳에서 누군가는 100년에 걸쳐 같은 하늘을 다른 시선으로 기록해온 흔적이 가득했다.

◇ 해발 3천572m 스핑크스 관측소…온실가스부터 우주선까지 관측

융프라우요흐역에서 100m 이상 더 올라가면 해발 3천572m의 스핑크스 관측소가 나온다.
알프스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어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찾는 명소지만 입구 엘리베이터 앞에 소개해 둔 각종 연구가 지금도 내부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관광객들과 함께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뒤 이번에도 HFSJG가 새겨진 철문을 열자 나선형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을 따라 옥상까지 오르자 알프스 빙하의 절경을 눈에 담느라 탄성을 내는 관광객들이 발아래로 보였다.
데쿠르틴스 의장은 "융프라우 철도가 스핑크스 천문대 개선에 상당 부분 투자하면서 고속 엘리베이터가 설치됐다"며 "야외에서 실험할 수 있는 공간도 넓어졌다"고 설명했다.

현재 쓰지 않는 천문관측용 돔 아래에는 각종 연구 장비가 자리 잡고 있었다.
태양 복사량 측정 장비부터 대기 중 기체 분석 장비, 미세플라스틱 포집 장비 등 다양한 장비가 옥상 곳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일부 장비는 영하 30도에서 작동하도록 가열 장치가 설치돼 있었다.
얼음이 장비 주변에 쌓이거나 낙뢰로 통신이 끊기는 경우도 있다고 푸르터 관리인은 설명했다.
이곳이 주목받는 이유는 온실가스 배출원 및 흡수원과 거리가 먼 가장 깨끗한 공기이기 때문이다.
푸르터 관리인은 "관광객이나 헬기 등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 이른 아침 공기가 깨끗할 때 샘플을 모은다"고 설명했다.

유럽 통합탄소관측시스템(ICOS)에서도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해 1급 관측소로 여겨지는 이곳은 온실가스 농도를 장기 측정하고 있다.
고도가 높은 만큼 우주에서 날아오는 입자를 측정하기에도 유리하다. 지상보다 우주선이 최대 13배 많이 관측되는 특성을 활용해 우주선 입자를 측정하는 장비도 설치돼 있었다.
오존층을 파괴하는 CFC 계열 물질을 추적하는 연구도 진행한다. 데쿠르틴스 의장은 "한국의 제주 고산측정소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관측 네트워크와 협력해 자료를 분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시 아래로 내려와 실험실에 들어오니 각종 연구소에서 온 장비들이 랙과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여기서 모은 공기 시료를 다른 연구기관으로 보내기 위한 박스들도 곳곳에 보였다.
이곳에는 내년부터 한국의 장비도 설치돼 실험에 나설 전망이다.
GIST 고등광기술연구원과 스위스 베른대가 공동으로 융프라우요흐와 거리로 57㎞, 고도차로 2.5㎞ 떨어진 짐머발트 간 양자통신 실증에 나선다.
이를 바탕으로 성층권 고고도 풍선과 드론 등을 활용해 지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도 양자통신이 가능한지를 검증하는 연구에 나설 예정이다.

◇ 자동화 속 사람 눈으로 이어가는 관측…기후변화도 체감
각종 전자동 설비가 가득한 관측소지만 기상관측에서는 여전히 사람의 역할이 남아 있다.
기온과 풍속 등은 자동 측정하지만 구름의 종류와 양은 사람이 직접 관찰하고 세계기상기구(WMO) 기준에 따라 3시간마다 하늘을 살핀다.
관리인이 24시간 상주하는 이유기도 하다.
푸르터 관리인은 "모든 관광객들이 빠져나간 이후에도 융프라우를 볼 수 있고 밤이나 일출 시간 융프라우까지 볼 수 있는 건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기상관측소 내부로 들어서자 융프라우와 알프스 최대 빙하인 알레치 빙하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관측소 내부 벽면 곳곳에는 1930년 이후 융프라우요흐의 기온 변화를 보여주는 그래프와 영상 기온이 나타나 빙하가 녹는 날의 수를 기록한 그래프 등이 붙어 있었다.
1940년대만 해도 영하 8도였던 이곳의 평균 기온이 2020년대 영하 6도 이상으로 올라가는 등 한결같이 우상향을 그리고 있었다.
푸르터 관리인은 "30년 전에는 이곳에 거의 비가 내리지 않았지만 지금은 5월부터 10월까지 비가 내리는 날이 있다"고 했다.

관측소를 빠져나와 전망대 옆 회전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번에는 푸르터 관리인이 열쇠로 문을 열고 숨겨진 엘리베이터를 작동시켰다.
연구소 설립 초기부터 1990년대까지 관광객들과 함께 이용했던 목조 엘리베이터였다. 지금은 연구자들만 이용하는 시설이다.
과거 관광객들이 남긴 흔적 사이 한국인들의 이름도 보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해발 융프라우요흐역으로 내려왔다.
관광객들이 무심코 지나가는 이곳 한편은 한 세기 가까이 대기와 기후 변화를 기록하는 연구 현장이기도 했다.

shj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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