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한양대 유럽아프리카연구소장

[※ 편집자 주 = 연합뉴스 글로벌문화교류단이 국내 주요 대학 아프리카 연구기관 등과 손잡고 '우분투 칼럼'을 게재합니다. 우분투 칼럼에는 인류 고향이자 '기회의 땅'인 아프리카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여러 교수와 전문가가 참여합니다. 아프리카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우분투 칼럼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우분투는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는 뜻의 아프리카 반투어로, 공동체 정신과 인간애를 나타냅니다.]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필자가 아프리카 현지 조사를 위해 북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를 돌 때였다. 길에서 만난 학생과 청년들이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고 한국 노래를 흥얼거리며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한국에 가 본 적도 없는 이들이 드라마 대사를 기억하고 아이돌 춤을 따라 하는 모습을 봤다. 한류가 통계표의 숫자가 아니라 이들의 표정과 몸짓 속에 이미 스며들었음을 느꼈다.
이제는 어떤 드라마와 음악이 더 인기를 얻을 것인가만 물어서는 부족하다. 한국의 이야기가 아프리카인의 삶과 감정 속에서 어떻게 재해석되고,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한국은 식민 지배와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세계화와 정보화를 비교적 짧은 시간에 겪었다. 그 과정에서 가족의 희생과 공동체의 연대, 교육을 통해 삶을 바꾸려는 열망, 불평등과 편견 속에서도 존엄을 지키려는 경험이 축적됐다. 역사적 조건은 다르지만 식민 지배와 빈곤, 급격한 사회변동을 경험해 온 아프리카 여러 사회와 공감할 수 있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문화가 국경을 넘는 힘은 낯선 풍경을 보여주는 데만 있지 않다. 서로 다른 삶 속에서 닮은 감정을 발견하게 하는 데 있다. 한국 문화가 사랑과 가족, 불평등과 정의, 좌절과 희망이라는 보편적 언어로 상처와 회복을 이야기할 때 세계의 시청자들도 자기 경험을 그 안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아프리카를 하나의 시장으로 봐서는 안 된다. 54개 유엔 회원국에 수많은 언어와 종교, 서로 다른 역사와 정치·경제 환경이 공존한다. 북아프리카의 아랍·아마지그 전통, 사헬의 이슬람과 유목문화, 서아프리카의 음악과 구전 전통, 동아프리카의 스와힐리 문화, 남부아프리카의 우분투 정신은 저마다 다르다. 한류가 오래 뿌리내리려면 공감의 접점만큼 지역의 정체성과 생활방식을 이해해야 한다.

'2026 해외한류실태조사'에서 한국 문화콘텐츠에 대한 호감도는 69.7%였다. 남아공은 75.2%, 이집트는 72.8%였다. 두 나라의 결과를 아프리카 전체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주요 거점에서 한류가 더 이상 낯선 외래문화만은 아니라는 점은 보여준다. 이제 이 호감을 일시적 소비가 아니라 지속적인 관계와 기회로 바꿔야 한다.
한류의 발전 과정은 그 방향을 보여준다. 한류 1.0이 드라마를 통해 사랑과 가족, 인내와 성공의 서사를 전했다면 아프리카 시청자들은 낯선 한국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희망과 좌절, 상실과 회복을 발견했다. 대표작 '대장금'도 궁궐이라는 낯선 배경을 넘어 낮은 신분의 여성이 시련을 이겨내고 자신의 능력으로 성장하는 보편적 서사로 공감을 얻었다.
한류 2.0은 K팝과 팬덤의 시대였다. 유튜브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팬들은 소비자를 넘어 번역자와 홍보자, 콘텐츠 확산의 주체가 됐다. 한국의 '흥'과 아프리카의 다양한 리듬 역시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개인의 감정을 공동체의 에너지로 바꾼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만났다.
블랙핑크 리사와 남아공 가수 타일라는 2025년 '웬 아임 위드 유'를 함께 발표했다. 같은 해 하이브도 타일라의 공동 매니저들과 손잡고 아프리카 아티스트를 세계시장과 연결하는 플랫폼 구축에 나섰다. 아직 성과를 단정하기는 이르지만, 아프리카를 콘텐츠 판매시장이 아니라 세계 음악을 함께 만드는 창작 파트너로 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류 3.0은 플랫폼과 생활문화로 확장되고 있다. 드라마와 음악에서 시작된 관심은 OTT와 웹툰, 게임, 한국어 학습을 넘어 음식과 뷰티로 이어졌다. 시청자는 리뷰와 패러디, 팬 영상과 번역 콘텐츠를 만드는 참여자로 변했다. 드라마 속 음식은 식탁으로, 아이돌의 스타일은 화장품과 패션으로 각각 옮겨갔다. 한류는 이제 보고 듣는 문화를 넘어 먹고, 바르고, 배우며 경험하는 문화가 됐다.

현지의 재창작도 시작됐다. 2024년 공개된 나이지리아 영화 '마이 선샤인-코리안 나이자'는 한국 드라마의 청춘 로맨스 형식을 나이지리아의 학교와 인물 속에 옮겼다. 배우들이 한국어 대사를 하고 한국 노래를 부르지만, 이야기는 분명 나이지리아의 삶 위에 서 있다. 한국 콘텐츠를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의 언어와 감각으로 다시 만들어낸 것이다.
이제 한류 4.0이다. 콘텐츠를 수출하는 데서 나아가 창작 생태계를 함께 만드는 단계다. 아프리카 작가와 한국 제작자가 함께 대본을 쓰고, 배우와 음악가가 협업하며, 현지의 이야기가 글로벌 콘텐츠로 성장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출발점은 현지화다. 지역의 언어와 종교적 감수성, 사회구조와 생활환경을 이해해야 한다. 화장품은 피부와 기후를, 음식은 식재료와 식습관, 종교적 기준을 각각 고려해야 한다. 높은 데이터 비용과 기기 가격, 통신 격차, 부족한 현지어 자막과 더빙 등도 여전히 장벽이다. 현지화는 포장과 광고를 바꾸는 기술이 아니다. 상대의 일상을 이해하고 제품과 콘텐츠, 경험을 함께 설계하는 과정이다.
무엇보다 한류가 아프리카 청년의 기회로 이어져야 한다. 한국어 학습자가 번역가로, K팝 팬이 공연기획자와 제작자로, K뷰티 소비자가 창업자로 저마다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 공동 작가실과 제작 캠프, 청년 워크숍과 번역 인력 양성, 현지 방송사·OTT와 공동제작이 필요한 이유다. 일회성 행사보다 대학과 방송사, 제작사가 함께 인재와 콘텐츠를 키우는 상설 체계가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현지 창작자는 주변부가 아니라 파트너여야 한다. 한국이 기획과 제작을 주도하고 현지 창작자가 일부 과정에만 참여한다면 공동제작은 이름만 바꾼 문화수출에 머물 수 있다. 이야기와 인물, 제작 방식은 물론 성과와 기회도 함께해야 한다. 정부와 기업 역시 단기 홍보를 넘어 인재 양성, 저작권 보호와 공정한 계약의 기반을 마련하고 한국문화원·세종학당·대학·기업의 사업을 유기적으로 연결해야 한다.
이렇게 쌓인 관계는 문화산업에만 머물지 않는다. 함께 배우고 만드는 과정에서 형성된 신뢰는 교육과 관광, 기술과 산업 협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문화적 친밀감이 사람을 잇고, 사람이 만든 관계가 경제와 외교의 기반을 넓힌다. 그렇게 축적된 신뢰야말로 한국과 아프리카를 오래 이어줄 외교적 자산이다.
결국 한류의 지속가능성은 무엇을 더 많이 보여주고 팔 것인가에 있지 않다. 서로의 이야기와 역량을 존중하며 무엇을 함께 만들고, 그 성과와 기회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달려 있다. 한류의 다음 단계는 한국 문화를 아프리카에 전달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경험과 상상력을 더해 새로운 문화를 함께 만드는 데서 시작된다.
남부아프리카의 우분투는 흔히 "사람은 다른 사람을 통해 사람이 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문화도 다르지 않다. 일방적으로 전달된 문화보다 함께 만든 문화가 더 멀리, 더 오래간다. 함께 만들면 공감이 생기고, 공감은 신뢰가 된다. 그 신뢰가 쌓일 때 한류는 한때의 유행을 넘어 한국과 아프리카가 서로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는 지속 가능한 외교 자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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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수 교수
현 한양대 유럽아프리카연구소장 겸 정치외교학과 교수, 미 USC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정치학 박사, 저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비교정치', '현대아프리카의 이해' 외 다수, 외교부·법무부·한―아프리카재단·재외동포청 등 공공기관 정책 자문위원 및 한―아프리카 경제협력위원회 한국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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