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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로] '혁명적 전통'…다시 불타는 프랑스

입력 2026-10-22 07:10  

[율곡로] '혁명적 전통'…다시 불타는 프랑스
물리력 혁명 선호해온 국민성…군 투입 예고된 주말 시위 분수령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프랑스인들에게는 '혁명의 유전자'가 흐른다. 1789년 '대혁명'을 시작으로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 1871년 '파리 코뮌', 1968년 '5월 혁명' 등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폭력 혁명을 통해 정치 체제가 바뀌고 사회 대변혁이 일어났다. 두 세기 가까운 근현대 정치사가 피로 얼룩진 것이다.

학계에선 이를 '혁명적 전통'으로 정의한다. 정치적 불만과 사회 갈등이 생겼을 때 의회주의나 법치주의로 풀기보다 가두로 뛰쳐나와 바리케이드를 치고 물리적으로 저항하는 걸 시민의 천부 권리이자 전통으로 여기는 프랑스 특유의 의식구조다. '자코비니즘'이란 말도 자주 쓰인다. 대혁명을 주도한 자코뱅당이 목적 달성을 위해 즉결 처형을 포함한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았던 급진적 태도를 말한다.



그래서 지금 프랑스 전역에서 일어난 폭동과 소요 사태는 그리 놀랍거나 새로운 일은 아니다. 문화 깊숙이 잠재된 폭력 혁명의 DNA가 때를 만나 다시 발현된 것뿐이다. 요즘 젊은이들 유행어로는 '프랑스가 프랑스 했다'라고 할까. 고교생들의 교육 환경 개선 요구로 시작한 시위는 재정 악화 및 정부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과 이민자 등의 가세로 폭력, 방화, 약탈이 무차별 자행되는 무질서와 혼란의 도가니가 됐다.

'아노미(무규범 상태) 프랑스'로 부를 수 있을 정도다. 파리, 마르세유, 리옹, 니스 등 주요 도시에선 도로변 차량, 대중교통·공공 시설, 쓰레기통 등에 기습 방화가 계속되고 있다. 전국적으로 최소 점포 3천여 곳의 시설이 부서지고 전시품들이 털렸다. 매장을 지키려던 직원들을 집단 폭행하기도 한다. 훔친 명품들을 거리나 온라인에서 죄책감 없이 파는 모습들도 목격된다. 중부 리모주에선 140년 역사의 시청사가 시위대 방화로 지붕이 무너지고 뼈대만 남은 채 타버려 충격을 줬다. 두 차례 세계 대전도 견뎌냈던 유서 깊은 문화재였다.

공권력은 우습게 여겨지며 시험대에 올랐다. 경찰·소방차에 기물을 던지고 진압 경찰들에 폭력을 가할 정도다. 경찰 및 기동대를 투입해 전국적으로 8천명 넘게 체포했지만, 경찰도 1천여 명이 다치고 사망자까지 나왔다. 폭동으로 인한 누적 피해액만 2조 원에 육박한다. 정부는 폭동이 멈출 기미를 안 보이자 지역별 야간 통행금지령과 일부 집회 금지령까지 내렸다. 오는 24일 예고된 대규모 시위에는 군 병력까지 투입된다. 만약 유혈 충돌이 커지면 계엄령 선포까지 가는 비상사태로 비화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혁명적 전통을 고려하면 이번 폭동이 단기간에 끝나긴 어려워 보인다. 문제는 이 사태가 쇠퇴 중인 프랑스 경제를 더 빠르게 망가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혁명들도 거창했던 원래 목적과는 반대 결과로 이어졌다. 대혁명은 막대한 인명 피해와 혼란을 불렀지만, 무너뜨린 왕정은 오히려 황제정으로 퇴보했다. 7월 혁명은 왕정을 축출했으나 금융 부르주아가 권력을 잡고 새 국왕을 내세웠다. 그러자 민중은 다시 폭동(2월 혁명)을 일으켜 왕을 쫓아내고 공화국과 선거권을 쟁취했지만, 계급 갈등이 커지자 초대 대통령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로 황제에 즉위했다. '세계 최초 노동자 정권'을 표방한 파리 코뮌은 서툰 실험 끝에 정부군에 진압됐고, 그 과정에서 무려 3만 명에 달하는 시민이 학살당했다.



프랑스의 혁명적 전통은 심지어 세계사 전체를 뒤바꿨다. 대혁명은 유라시아 대륙 전역으로 공산·사회주의가 확산하는 모태이자 사상 거점이 됐다. 대혁명 지도자들은 사유재산 폐지, 생산·분배 통제, 혁명 전위대의 사회 개조까지 주장했고, 이는 훗날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론'으로 계승된다. 마르크스도 대혁명의 계급 투쟁을 분석해 '사적 유물론'을 확립했다. 특히 프랑스 대혁명은 소수 혁명가가 국가 구조를 강제로 재구성한 실증 사례가 됐다. 파리 코뮌은 마르크스가 제시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원형으로 불린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자신들을 자코뱅의 후예로 자처할 정도였다. 이 혁명적 전통은 러시아,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조선 등으로 전파돼 사회주의 국가 건설 및 유지에 견인차가 됐다. 서구 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희생된 인류의 수가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숫자를 넘어선다고 지적한다.

미국을 비롯한 다른 서방국들이 이번 프랑스 폭동에 우려를 표하는 데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다. '서구 문명 발원지' 유럽에서도 그 중심에 위치한 프랑스에서의 변화는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미 인접국들로 비슷한 성격의 시위가 번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프랑스가 이민자와 증오 세력에 의해 "불타고 있다"며 국경 봉쇄 등을 주문했다. 작년 말 미국은 이례적으로 '국가안보전략'(NSS) 공식 보고서를 통해 유럽 이민자 문제와 이념 편향을 지적하며 '문명 소멸'을 경고하고, 기독교 보수주의로 상징되는 '서구적 정체성'을 회복하라고 훈계한 적도 있다. 유럽 국가들은 당시 발끈했지만, 최근 서유럽 각국에서 실제로 이민자 문제가 심각해지자 할 말을 잃었다. 위기에 빠진 프랑스의 내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그 끝은 어떻게 마무리될지 세계가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lesli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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