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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총리 "노예무역 사과에 열려 있어"…배상 요구는 일축

입력 2026-11-02 19:38  

영국 총리 "노예무역 사과에 열려 있어"…배상 요구는 일축
카리브해 영연방정상회의…"사과 요구 경청하나 오늘날 영국민 책임 아냐"
카리브해공동체 "회복 노력 없는 사과는 불완전"


(런던=연합뉴스) 김지연 특파원 = 앤디 버넘 영국 총리가 과거 영국의 대서양 노예무역에 대해 사과할 가능성을 열어뒀으나 배상 가능성은 일축했다.
AP·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버넘 총리는 56개 영연방 국가 정상들이 격년으로 모이는 영연방 정상회의(CHOGM) 참석을 위해 2일(현지시간) 카리브해 국가 앤티가 바부다 방문길에 오른다.
버넘 총리는 이에 앞서 지난 1일 가디언 기고에서 "수백만 명의 고통에 슬픔과 유감을 느낀다"면서 "우리는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영향을 받은 이들과의 체계적인 대화를 제안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영국을 대표해 공식적인 사과를 하라는 요구를 경청하는 것은 이 과정의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며, 나는 이에 열려 있다"고 사과 가능성까지 열었다.
그러나 금전적 배상은 명확하게 거부했다.
버넘 총리는 "아무리 극악무도한 것이었다고 해도 그 역사적 잘못을 오늘날의 영국민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며 "그 잘못한 다른 법률이 적용된 다른 시대에 발생했고 오늘날의 영국민이 개인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버넘 총리는 영연방에서 가장 큰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국가들의 부채 관리 비용이 25년 만의 최대 수준이라면서 "글로벌 파트너들과 협력해 이들 국가가 더 장기적으로 더 나은 금리 수준에 부채를 상환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계획을 추진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버넘 총리는 또한 기후 위기에 대응해 이들 국가의 에너지 전환을 지원하고 여성 교육 강화, 불평등 해소, 빈곤 퇴치를 돕겠다고 적었다.
카리브해 국가들의 협의체인 카리브공동체(CARICOM·카리콤)는 버넘 총리의 기고 이후 낸 성명에서 "사과는 필수적인 첫걸음"이라며 "그러나 회복 노력이 없는 사과는 불완전하다"라고 평가했다.

카리브해의 영연방 국가들은 제국주의 시대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현대에 독립한 국가들이다. 앤티가 바부다를 비롯한 상당수 국가에서 여전히 영국왕을 국가원수로 두고 있다.
16세기부터 400여년간 1천250만명 넘는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무역선에 강제로 올랐고, 그중 200만명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는 길에 목숨을 잃었다.
영국은 16세기 중반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뒤를 이어 노예무역에 뛰어들었고 정점일 때는 최대 규모의 노예무역 국가였다.
서아프리카에서 붙잡힌 노예들은 상품과 맞교환돼 바다 건너 카리브해 지역의 설탕 및 담배 농장으로 보내졌다. 이렇게 생산된 제품은 다시 잉글랜드로 들어왔다.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 치하에 운영된 왕립아프리카회사는 아프리카인 8만명을 아메리카로 보냈다.
잉글랜드에서 노예제 폐지 운동은 18세기 말 시작됐고, 노예무역 금지는 1807년, 대영제국 내 노예제 불법화는 1833년에 이뤄졌다.
네덜란드가 2022년 노예무역과 관련해 사과했으나 노예무역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의 후손이나 국가에 직접 금전적 배상을 한 나라는 없다.
영국 정부 역시 대서양 노예무역에서 국가가 했던 역할에 대해 사과도, 배상도 하지 않고, 이에 따라 영연방 정상회의에서도 배상 문제를 의제로 올리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해 왔다.
2024년 영연방 정상회의에서도 카리브해 및 아프리카 회원국들이 배상 문제를 논의하자고 요구했으나 키어 스타머 당시 영국 총리는 배상 문제는 영국의 의제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영연방 수장인 찰스 3세 국왕은 지난달 27일부터 카리브해 국가들 순방에 나섰고 오는 4일까지 이어지는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지난달 30일 앤티가 바부다에 도착했다.
카리브해 국가들은 찰스 3세의 순방을 계기로 과거 노예무역에 영국이 관여했던 것을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배상하라는 목소리를 높였다.

찰스 3세는 영연방 정상회의 연설을 통해 "위축하지 않는 정직함과 진정한 슬픔"을 표시할 예정이라고 버킹엄궁은 전했다.
그러나 영국왕은 헌법으로 정해진 정치적 중립의 의무를 벗어날 수 없는 만큼 사과 및 배상에 관한 영국 정부의 정책을 언급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제1야당 보수당의 케미 베이드녹 대표는 버넘 총리에게 공식 사과를 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베이드녹 대표는 "우리는 노예무역에 대해 사람들에게 보상금을 줘서는 안 된다"며 "버넘 총리는 사과도 해선 안 된다. 그게 금전적인 요구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cheror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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