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당당히 따라해라! 혁신이 시작될 것이다

입력 2013-04-18 17:15   수정 2013-04-18 23:40

특허법 적용없는 패션·요리, 대놓고 '베끼기' 성행

따라하면서 창작 촉진돼
싸이의 성공요인도 모방…무단복제 새로운 접근 주장

모방의 경제학
크리스토퍼 스프리그맨· 칼 라우스티아라 지음 / 이주만 옮김 / 한빛비즈 / 428쪽 / 1만8000원



대개의 국제영화제도 그렇지만 매년 봄 열리는 아카데미상 시상식은 스타들의 패션 경연장이다. 할리우드 스타들은 저마다 유명 디자이너가 만든 값비싼 의상을 입고 레드카펫에서 포즈를 취한다. 방송을 통해 전 세계에 중계되는 이들의 패션쇼에서 누군가는 영화계와 패션계의 스타로 떠오르고 누군가는 최악의 패션에 선정된다.

뉴욕시 7번가에 있는 의류업체 파비아나의 디자이너들도 이 시상식 패션쇼를 주의깊게, 꼼꼼히 시청한다. 그리고는 시상식이 끝나자마자 유명 스타들이 입었던 옷을 그대로 베낀 드레스 컬렉션을 선보인다. 이 회사의 웹사이트에는 ‘스타처럼 입어보자’는 링크와 함께 안젤리나 졸리, 사라 제시카 파커 같은 스타들이 원래의 드레스를 입은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파비아나는 이처럼 의상 디자인을 베꼈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선전한다.

대부분의 창의적 산업에서 베끼기는 불법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놀랍게도 패션디자인은 저작권법이 보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패션 회사의 상표(브랜드)는 침해되지 않도록 엄중하게 감시한다. 덕분에 패션계에서는 단순한 참조 수준을 넘어 노골적으로 베끼는 것이 합법화돼있다. 그런데도 패션업계의 창의적 활동은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활발하다.

《모방의 경제학》의 저자들은 이런 사례를 들며 ‘베끼기가 성행하면 창작의지가 꺾이고 혁신은 사라지며 결국 경제는 후퇴한다’는 전통적인 견해에 딴지를 건다. 이들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모방과 혁신의 문제에 접근한다. 패션처럼 산업 분야에 따라서는 베끼기가 합법적 허용돼 창의적 활동이 더 활발한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또 혁신을 위해 베끼기를 지나치게 제한함으로써 자유로운 경쟁을 막는 것이 합당한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지식재산권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로 손꼽히는 저자들에 따르면 미국의 법제도가 베끼기를 규제하는 주된 이유는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실용적 판단에서다. 창작자들에게 복제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해야 혁신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난다는 것. 이것이 혁신의 독점이론이다. 하지만 저작권법이나 특허법이 적용되지 않는 패션, 데이터베이스, 코미디, 요리, 금융상품, 폰트산업 같은 분야에선 다른 사람들이 자유롭게 베끼는 데도 창작활동이 왕성하게 전개된다. 패션업계처럼 경우에 따라선 베끼기가 외려 창작활동을 촉진한다. 저자들은 이를 ‘베끼기의 역설’이라 부르면서 “놀랍게도 창작활동과 베끼기가 공존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한다.

요리업계도 그런 사례의 하나다. 요리업계에서는 새로운 조리법이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지 못해 베끼는 게 자유롭다. 아무리 유명한 요리사가 새로운 조리법을 개발해도 금세 다른 요리사들이 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요식업계가 위축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미국 전역의 레스토랑에서 매년 수천 가지 요리가 새로 탄생한다.

코미디계도 마찬가지다. 데인 쿡은 미국 스탠드업 코미디의 슈퍼스타지만 동료 코미디언들의 사랑은 받지 못한다. 쿡은 남의 재담을 훔치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어서다. 원칙적으로 재담도 저작권법의 보호 대상이지만 재담의 표현만 보호할 뿐 아이디어는 보호하지 않기 때문에 표현을 살짝 고치는 방법으로 법망을 피하기가 쉽다. 그런데도 새로운 재담과 촌극, 코미디클럽과 코미디바는 더 성행하고 있다.

데이터베이스(DB)산업에서도 창작과 표절이 공존한다. 1992년에 제정된 유럽연합 지침은 데이터의 보호기간을 출시 이후 15년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제작자가 유럽인이거나 그에 준하는 경우에만 보호하므로 미국인이 생산한 DB는 보호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결과는 거꾸로다. 미국의 DB산업은 계속 성장한 반면 유럽 DB회사들은 미국에 뒤처졌다.

저자들은 다양한 사례를 검토한 끝에 무단복제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무조건 제거해야 할 골칫거리로 보지 말고 유해한 만큼 이로움도 주는 복잡한 현상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 경우에 따라선 베끼기가 혁신의 연료로 쓰일 수 있다. 오리지널 상품을 광고하고 시장경쟁을 활성화해 더 좋고 가치있는 상품과 서비스가 생산될 기반을 만들 수도 있다고 저자들은 설명한다.

물론 저자들이 불법복제를 무조건 허용하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규제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베끼기의 긍정적인 기능도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가령 지난 10여년간 음악산업 수익은 60% 이상 곤두박질쳤다. 불법 다운로드 때문이다. 그러나 음악 자체는 더욱 활성화되고 있다. 따라서 음악산업의 전략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저자들은 제안한다. 저자들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싸이의 ‘강남스타일’과 ‘젠틀맨’의 성공 포인트가 바로 베끼기를 허용한 결과였지 않았던가.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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