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마포 사람들

입력 2015-02-16 20:36   수정 2015-02-17 06:54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마포(麻浦) 지명에 삼 마(麻)자가 들어간 이유는 뭘까. 인근 와우산과 노고산, 용산 끝자락에 호수처럼 발달한 3호(서호, 마호, 용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우리말 삼개(三浦·3개의 포구)로 부르다가 한자 지명 마포로 바꿨다고 한다. 풍광이 워낙 좋아 마포나루, 서강나루, 양화나루 일대는 마포8경으로 꼽혔다.

마포는 전국의 물산이 모이는 해운·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염리동(鹽里洞)이란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소금장수와 새우젓장수가 많았다. 대흥동의 최근 지명이 동막이었는데 이는 옹기를 굽는 옹막(甕幕)이 바뀐 것이다. 사람과 물자가 모이니 부자도 많이 생겼다. 마포나루에서 신촌으로 가는 길에 황부자 땅을 밟지 않고는 갈 수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고위층의 별장도 곳곳에 자리잡았다. 염리동 동도중·고교 자리에는 흥선대원군의 만년 별장 아소정(我笑亭)이 있었다. 대원군은 이곳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자신의 일생이 너무나 덧없다는 뜻에서 ‘스스로 조소한다’는 이름을 지었다. 합정동에 있는 망원정(望遠亭)은 월산대군의 별장인데, 원래 효령대군이 세운 희우정(喜雨亭)에서 이름을 바꾼 것이다. 하수동 강변의 영복정(榮福亭)은 양녕대군이 지은 것이다. 마포동 언덕에는 신숙주 별장 담담정(淡淡亭)이 있었다.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도 한때 이 부근에 살았다.

상암동에는 실학의 선구자 한백겸, 마포대교 남쪽 유수지에는 토정 이지함이 살았다. 그의 호 토정은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살았기에 붙은 것이라고 한다. 성산동의 옛 풀무골은 반역죄로 처형된 김자점이 풀무간을 차려놓고 병기를 만든 곳이기도 하다.

마포는 서구문명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이다. 그래서 절두산 순교성지, 외국인 묘지 등 근현대사의 문화유적이 많다. 전차가 다니던 시절 은방울 자매는 ‘마포종점’으로 수많은 이의 애환을 달랬다. 그때 전차가 다니던 곳은 지금 지하철 역으로 바뀌었다. 비행장이 있던 여의도는 금융인과 정치인들로 붐비고, 홍대앞과 신촌거리는 젊음으로 넘친다.

최근에는 마포대로 주변에 대규모 뉴타운단지가 들어서면서 직주근접형 패턴을 선호하는 직장인이 몰려들고 있다. 도심과 여의도 주변의 샐러리맨 수요가 급증해 전셋값도 목동과 여의도 상암동을 넘어섰다. 국회와 서울역이 가까워 고위 공무원과 정치인까지 모여든다고 한다. 경치 좋고, 교통 편리하고, 물산 풍부한 곳에 사람이 몰리는 건 옛 삼개나루 시절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세상 이치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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