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근미와 떠나는 문학여행] 일상의 지겨움을 몰아내려는 주인공 야자키…천사같은 마츠이를 즐겁게 해주려 어떤 일을…

입력 2016-02-29 07:01  

(10) 무라카미 류의 '69'



1969년의 경험을 담은 ‘69’

소설이 선물인 이유는 뭘까? 바쁜 일상 속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 반복된 일만 하는 우리를 뒤흔들기 때문일 것이다. 가슴을 아프게 헤집거나, 뭔가 유쾌해서 미치게 만들거나, 잊고 있었던 감성이 뻥 터질 듯 부풀어 오르거나, 소설은 일상적이고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분을 맛보게 해준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류의 ‘69’는 이 모든 것을 담은 소설이다.

명사들에게 기억에 남는 소설, 재미있게 읽은 소설 몇 편을 추천해달라고 할 때 빠지지 않는 작품이 바로 ‘69’이다. 소설가들에게는 읽는 순간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추억이 마구 떠올라 독서가 힘들어지는 그런 책이다.

‘69’라는 제목은 작가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69년에 겪은 일을 담은 데서 기인했다. 무라카미 류는 후기에서 ‘이 책은 내 주위에서 일어난 일을 일부 기록한 것’이라고 밝혔는데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의 노래가 유행하고, 히피들이 사랑과 평화를 부르짖었고, 파리에서는 드골 정권이 물러났고, 베트남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던 때’가 바로 1969년이다. 작가의 고향 나가사키현 사세보시는 미해군의 원자력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가 입항하면서 미국문화에 빠르게 잠식당한 곳이다.

공부보다 페스티벌에 관심가는 10대

1969년은 1년 넘게 계속된 격렬한 학생운동으로 인해 도쿄대의 입시가 중지된 해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했으나 6·25 전쟁 특수로 경제가 회복된 일본은 이념 대립으로 사회가 몹시 혼란스러웠다. 무라카미 류도 1969년 고등학교 옥상에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데모를 하여 무기정학을 받았다. 이런 시대적 배경과 작가의 경험, 당시 문화가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적절히 인용된 팝송과 책, 시대에 대한 비판에서 작가의 저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식스티나인 69’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져 2005년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됐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늘 그렇듯 좌충우돌하면서 위험지대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야자키 겐스케는 공부를 잘하는 록밴드 드럼주자이면서 저항적인 내용을 담은 신문발행과 연극 공연 시도를 한 북고(北高)의 유명인사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첫번째 종합시험에서 최악의 성적을 받는다. 그럼에도 ‘그냥 공부가 싫은’ 주인공은 페스티벌 준비에 열을 올린다. 북고 여학생뿐만 아니라 인근 학교의 여학생들이 다양한 전시회, 연극과 영화, 록밴드를 보러 몰려오길 기원하면서.

최고 미녀에게 잘 보이고 싶다

그런데 북고 최고의 미인인 마츠이 카즈코가 페스티벌이 아닌 ‘투쟁’에 관심을 보이자 야자키는 ‘바리케이트 봉쇄’를 계획한다. 거사는 야자키와 아다마의 지휘아래 착착 진행되었고 종업식 전날 밤에 친구들은 차질없이 옥상에 바리케이트를 친 뒤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라는 플래카드를 건다. 이 구호는 지금도 여기 저기 인용될 정도로 유명하다.

감쪽같이 일을 마무리 지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가담한 친구들이 모두 드러나고, 주동자인 야자키와 아다마는 무기 자택 근신 처분을 받는다. 119일만에야 근신이 풀려 꾸준히 집에 찾아온 담임과 장미꽃과 편지를 보내준 마츠이 카즈코가 맞아주는 학교로 돌아간다.

여전히 답답하기만 한 학교에서 야자키는 기어코 페스티벌을 다시 기획하고, 결국 멋지게 해낸다. 하지만 1년 뒤, ‘일방적인 변심’을 한 마츠이 카즈코는 연상의 보이프렌드에게 가버린다.

‘69’는 현재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의 상황을 대입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는 점이 우선 놀랍다. 획일화된 학교 문화, 입시 압박, 복잡한 정세가 얽혀 있는 상황이 너무도 닮아있다.

무라카미 류는 후기에서 ‘나는 고교 시절에 나에게 상처를 준 선생들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소수의 예외적인 선생을 제외하고. 그들은 정말 소중한 것을 나에게서 빼앗아 가버렸다’며 교사들을 ‘지겨움의 상징’이라고 표현한다.

준비하면서 즐기는 지혜를 발휘

세계적으로 입시가 치열하기로 유명한 한국과 일본의 고교생들이 ‘페스티벌’을 즐기기 힘든 건 사실이다. 무라카미 류는 ‘유일한 복수는 그들보다도 즐겁게 사는 것’이라며 ‘지겨운 사람들에게 웃음소리를 들려주기 위한 싸움을 일평생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학교든 사회든 지겨운 사람들은 있고, 바리케이트 봉쇄와 페스티벌이 고교생의 권리는 아니다. 배움의 시기에 본분을 잃지 않으면서 즐겁게 지내는 지혜를 발휘하는 게 좋을 듯하다. 자신에게 가장 맞는 분야를 찾아 미래를 잘 준비하는 것이야말로 지겨움을 벗어나는 길이 아닐까.

무라카미 류는 졸업 2년 후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들어갔고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써서 ‘군상’ 신인문학상과 아쿠다가와상을 수상했다. 그는 소설 집필 외에 영화감독, 사진작가, 화가, 방송 리포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남달랐던 고교 시절 경험이 예술 활동에 도움이 된 것이다. 빛나는 10대, 반항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나’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이근미 <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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