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철의 논점과 관점] 수렁에 빠진 벤처 생태계

입력 2018-01-02 17:49  

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


‘삼성그룹에 육박하는 매출과 6대 그룹에 맞먹는 일자리 창출.’

중소벤처기업부가 지난달 28일 발표한 ‘2017년 벤처기업 정밀실태조사’ 요지다. 2016년 기준으로 벤처기업 수는 3만3360개로 집계됐다. 벤처기업 총매출(228조2000억원)이 재계 순위 1위 삼성그룹(280조원)에 근접했고, 총고용(76만4000명)은 자산 기준 6대 그룹(76만9395명)과 비슷해졌다는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해 본격 태동한 벤처가 약 20년 동안 이뤄낸 성과다.

역동성 사라지는 벤처

하지만 벤처기업 정밀실태조사에서 드러난 각종 지표를 꼼꼼히 살펴보면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 최근 들어 성장성과 수익성이 급격히 둔화되는 등 곳곳에서 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2016년 벤처기업당 매출은 68억5000만원으로 전년보다 7.9% 늘었지만, 매출 증가율은 역대 최저 수준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8년(9.9%)보다 2%포인트 낮았다. 일반 중소기업의 2016년 매출 증가율(8.9%)도 따라가지 못했다. 벤처기업 매출 성장세가 일반 중소기업에 뒤처진 것은 처음이다. 벤처기업의 매출 대비 영업이익률도 4.4%로 2년째 하락했다. 일반 중소기업(3.9%)과 큰 차이가 없다.

기술에 대한 자신감도 크게 떨어졌다. ‘기술 수준이 세계 최고와 동일 수준이거나 그 이상’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한 벤처기업은 최근 3년 새 가장 낮은 18.6%에 그쳤다. “세계 일류 기업의 기술 수준을 따라잡기 어려워지고 있다”고 벤처업계는 하소연하고 있다.

일부 벤처인은 ‘벤처 위기론’까지 거론하고 있다. 정부와 민간이 수조원의 자금을 쏟아붓고 있지만 벤처 실적 개선은 요원해서다. 개별 벤처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벤처 생태계 전반의 구조적인 문제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벤처시장엔 돈이 넘친다. 정부는 올해 정책자금 3조7350억원과 연구지원자금 1조920억원을 벤처·중소기업에 지원한다. 최근 3년간 벤처캐피털을 통한 투자액은 연평균 2조원을 넘었다. 올해는 사상 최고치인 2조5000억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정체된 벤처시장에 과도한 유동성은 ‘돈맥 경화’를 부추길 수 있다. 올해부터 연 1조원이 넘는 펀드 만기 물량이 쏟아진다. 벤처펀드가 기업 인수합병(M&A)이나 상장을 통해 만기 펀드 물량(기존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하면 신규 투자자금을 마련하기 어려워진다. 펀드 자금이 연쇄적으로 묶일 가능성이 높다. 벤처기업 실적이 크게 개선되지 않아 상장과 M&A가 제자리걸음을 하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다.

‘창업-성장-회수(기업 M&A나 상장)-재투자’에 이르는 벤처 생태계가 제 기능을 못하는 탓이다. 창업과 성장을 막는 각종 규제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벤처기업인들은 입을 모은다.

창업과 성장 막는 규제

4차 산업혁명이 진행 중인데도 규제는 갈수록 늘어나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중국이 3000만 명 고객을 확보한 원격진료는 막혀 있고, 드론 하나 마음 놓고 띄울 공간을 찾기 어렵다. 유전자 가위 등 세계 최초로 기술을 개발해도 실험하러 외국으로 나가야 하는 처지다. 우버 등 세계 100대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이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했다면 13곳은 불법, 44곳은 사업모델을 바꿔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보고서도 있다. 오죽했으면 벤처 단체들이 작년 말 ‘혁신벤처생태계발전 5개년 계획’을 스스로 만들고 “규제만 없애주면 2022년까지 좋은 일자리 200만 개를 창출하겠다”고 정부에 제안했을까. 벤처 생태계를 살아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정책자금이 아니라 규제 혁파다.

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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