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야기(11)] 손창섭의 《잉여인간》

입력 2018-04-16 09:01  

손은주 선생님과 함께하는 한국문학 산책



손창섭이 쓴 1958년 작품

‘잉여.’ 인터넷상 유행어다. 요즘은 오덕, 덕후, 덕질 등의 유행어에 밀려 한물간 느낌이지만 여전히 널리 쓰이며 캐잉여, 잉여롭다, 잉여력, 잉여짓 같은 단어까지 파생해 내었다. 잉여의 사전적 의미는 ‘쓰고 난 후 남은 것’, 즉 나머지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현수의 아버지는 “너 대학 못 가면 뭔지 알아? 잉여인간이야, 잉여인간. 잉여인간 알아? 인간 떨거지 되는 거야”라며 가혹하게 현수를 질책한다. 이때의 잉여인간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무가치한 인간이다. 그런데 우리의 문학사에는 이미 일찌감치 잉여인간이 존재했고 이는 1958년 손창섭의 발표작 《잉여인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만기 치과의원 원장인 서만기는 번듯한 용모에 뛰어난 의술, 훌륭한 인격을 갖추었다. 그리고 간호사 홍인숙은 그런 만기를 존경하고 흠모하여 성심을 다하여 만기를 돕는다. 이 병원에 아침마다 출근하는 인물로 만기와 홍인숙 외에 만기의 중학 동창인 채익준과 천봉우가 있다. 직업이 없는 이 두 잉여인간은 매일같이 병원에서 소일한다. 익준은 마음에 들지 않는 신문 기사를 보면 비분강개하며 부정적인 사회 현실을 개탄한다. 게거품을 물고 일장연설을 하는 그의 머리와 가슴은 늘 뜨겁다.

봉우는 익준과 대조적인 인물이다. 잉여도 제각기 개성이 있는 법. 그는 인기척도 없이 슬그머니 병원에 들어와 대기실 구석에 깍지 낀 두 손을 얌전히 무릎에 얹고 앉는다. 신문도 기사 제목을 대강 볼 뿐이고 익준의 연설에 대꾸하는 법도 없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그림자처럼 앉아 잠을 잔다. 그것이 그의 일과의 전부다. 그의 눈이 빛날 때는 간호사 홍인숙을 볼 때뿐이다. 홍인숙이 퇴근하면 집까지 따라가고 인숙의 모습이 골목길로 사라지면 풀이 죽어 발길을 돌린다.


늘 불만인 익준과 무기력한 봉우

만기는 이런 동창 둘을 벽안시하지 않고 따뜻하게 대해준다. 봉우의 처는 경제 활동이 몹시 뛰어나서 가족을 부양하고 부를 축적한다. 만기가 세 들어 있는 치과의 건물주이기도 한 그녀는 만기를 거듭 유혹하다가 거절당하자 월세 계약 만료를 통보한다. 열넷이나 되는 식구를 부양해야 하는 만기는 눈앞이 캄캄한데 익준의 어린 아들이 와서 엄마가 병으로 죽었고 익준은 연락이 되지 않음을 알린다. 만기가 급전을 융통하여 장례를 치른 후에야 공사판에서 머리를 다친 익준이 돌아온다. 그는 상복을 입은 아들을 보고 장승처럼 서서 움직일 줄 모른다.

심란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다. 봉우와 익준은 사실 요즘 잉여들은 따라잡기 힘든 ‘잉여캐(잉여 캐릭터)’다. 이런 압도적인 ‘잉여력’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 소설의 발표연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58년. 전쟁 후 온통 폐허였을 나라. 일자리는 부족하고 사회제도는 정비되지 못했고 온 국민이 가난하기 짝이 없어 살아내기 위한 전투가 곧 삶이던 시대.

사실 봉우도 처음부터 잉여는 아니었다. 중학 시절 재기발랄한 야심가였던 그는 전쟁통에 양친과 형제를 잃고 매사에 흥미를 잃었다. 그가 항상 조는 것은 밤에 깊이 자지 못하기 때문이다.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숨어 지낸 봉우는 공습에 대한 공포 때문에 24시간 한시도 긴장을 풀어본 일이 없고 그것이 고질화되어 현재까지 이어졌다. 말하자면 그는 전쟁에 가족과 잠을 뺏긴 사람이다. 익준 역시 무능하고 나태하다고 비난만 하기에는 안타까운 데가 있다. 불의를 보고 못 참는 그는 신문을 볼 때뿐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흥분한다. 그래서 직장에 오래 붙어 있지를 못한다. 고지식하고 밑천이 없으니 장사도 할 수 없다. 노동판에 섞여도 보았으나 사무실에서 인부들의 임금을 속여먹는 걸 알고 따지다 주먹다짐까지 벌인 후 그만둬 버렸다. 아마 익준도 시스템이 합리적으로 돌아가고 투명한 룰이 세워진 사회였다면 자기 몫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다 죽어가는 아내에게 주사라도 몇 대 맞춰 보려고 공사판을 찾아가서 막노동을 한다. 그러느라 결국 아내의 임종을 못 지켰지만.

전쟁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전쟁의 비극은 종전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매일 매시 살아남은 사람들을 치고 때리고 할퀸다. 당시 잉여인간은 전쟁의 발톱에 삶의 의지를 찢긴 채 시대를 배회하던 우울한 군상의 표상이다.

요즘 인터넷상에서 잉여라는 단어는 꼭 부정적 뉘앙스만 띠고 있지 않다. 특히 음악잉여, 미술잉여, 책잉여들의 놀이는 당장 가시적 결과물을 생산하지 않지만 창조를 위한 부화의 과정으로 여겨진다.

손창섭은 전후세대 문학의 대표작가로서 극한 상황이 낳은 불구성과 삶의 허망함을 개성적이고 밀도 있는 문장으로 그려내었다. 1972년 일본으로 건너가 철저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한국일보에 장편소설을 두어 번 연재했을 뿐 이후의 생활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며 2010년 일본에서 작고하였다. 그가 계속 활동하여 21세기식 잉여로 진화하는 기회를 가졌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다소 뜬금없는 아쉬움을 느낀다.

손은주 < 서울사대부고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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