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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석대의 교실은 잘 돌아간다.
엄석대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문열, 1987년)의 ‘영웅’이다. 엄석대는 담임 교사를 대신해 아이들을 지배하고 통제한다. 엄석대가 ‘다스리는’ 학급은 겉으로 보기에 완벽하다. 그가 이끌고 나가는 운동팀은 모든 반 대항 경기에서 우승했고 학급 비품은 어느 반보다 넉넉했으며 교실은 깨끗하고 화단은 환하다. 성적도 우수할뿐더러 그가 실습 감독을 하는 실습지는 수확이 가장 많다. 학급은 일사불란하고 효율적으로 운영된다. 물론 이 완벽함의 이면에는 영웅 엄석대의 폭력적 권력이 도사리고 있다. 그의 권력은 막강해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 그리고 직접 나서지 않고도 마음에 들지 않는 급우를 괴롭힐 수 있을 정도로 그의 통치술은 교묘하다.
석대에게 순응하지 않고 도전했던 한병태는 한 학기 내내 괴롭힘을 당한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 오는 주먹 싸움에서 매번 참패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임에도 집단적 기세에 눌려 싸움 등수는 꼴찌로 밀려났고, 철저한 따돌림을 당해 함께 놀 친구 하나 없는 상태가 된다. 딴 아이들이 다 하는, 어쩌다 걸려도 가벼운 꾸중으로 끝날 뿐인 잘못들, 예를 들면 동네 만화 가게에서 만화를 읽은 것 따위도 엄청난 비행으로 자치회에 고발돼 처벌을 받고 학교 전체에 알려질 만큼 말썽 많은 불량 학생이 돼버린다. 이러니 공부도 제대로 될 리 없다. 상위권이던 성적은 어느새 겨우 중간을 웃돌 뿐인 정도로 내려가고 만다. 한 학기를 버틴 병태는 결국 석대에게 굴복한다. 저항을 포기한 순간 병태가 흘린 눈물은 무력함과 외로움을 온전히 노출했기에 몹시 굴욕적인 것이었지만 항복의 열매는 굴욕을 잊게 할 만큼 달콤했다. 석대는 병태에게 한없는 자비를 베풀었고 병태는 한순간 학급에서 2인자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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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대를 고발하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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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실망스럽다. 석대를 비호하던 이전 담임 교사, 석대에게 당한 사실을 하소연하는 병태에게 석대처럼 강하게 자라기를 은근히 강요한 병태의 아버지. 그런 어른들 때문에 석대는 영웅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새 담임교사는 좀 다르다. 새 담임 덕에 아이들은 부당한 권위에 저항하는 기회를 얻게 되니까. 그러나 아이들의 그 저항이라는 것이 담임교사라는 더 큰 권위의 보호 아래 이뤄졌다는 점은 아쉽다. 보호받는 저항이라니, 살짝 데친 생선회 같지 않은가? 실망스러운 것은 어른들만이 아니다. 병태가 석대에게 부당한 압박을 당할 때 외면하던 아이들의 갑작스러운 정의감을 병태는 믿지 못한다. 병태에게 아이들은 ‘석대가 쓰러진 걸 보고서야 덤벼들어 등을 밟아대는 교활하고도 비열한 변절자로밖에 비쳐지지 않았다.’
30년이 지난 어느 날, 병태는 수갑이 채워진 채 경찰에게 연행되는 석대를 우연히 목격한다. 지난날의 영웅 석대가 범죄자로 전락한 것이다. 씁쓸하기 짝이 없는 해후다. 그 옛날 석대가 그 학급에서 다른 방법으로 패배했다면, 그러니까 진심으로 사과하고 참회하면서 친구들과 함께 지낼 기회를 가졌다면 그에게 다른 미래가 열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 담임 교사에게는 엄석대라는 소폭군을 ‘제압’할 길이 더 큰 권위를 폭력적으로 행사하는 것 말고는 없었을까?
우상의 몰락을 그린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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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급의 ‘일그러진 영웅’을 다루는 또 다른 소설에 《아우를 위하여》(황석영, 1972년), 《우상의 눈물》(전상국, 1980년) 등이 있다. 각 작품 속의 영웅이 어떻게 다른지, 또 그들이 어떻게 몰락하는지 비교하며 읽으면 꽤 재미있다. 두 작품에서 영웅 또는 우상의 몰락은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이뤄진다. 일독을 권해본다.
이 글을 읽는 학생들의 학급에 혹 ‘영웅’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일그러진 영웅이 없는 학급을 만드는 것은 학급 구성원 모두의 노력으로 가능하리라. 그러므로 ‘엄석대’가 없는 학급에 살고 있다면 모두가 영웅인 행복한 학급에서 잘살고 있는 것이라 믿어도 될 것 같다.
손은주 < 서울사대부고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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