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영호 "北 김정은, 자기 감정 못 숨기며 '조급한 젊음' 드러내"

입력 2019-05-02 13:48   수정 2019-05-02 13:54

북한을 가까이서 겪은 사람들
(1)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공사

‘하노이 회담’ 결렬은 미·북 모두 성공적 결과
양측이 원하는 게 뭔지 확실하게 깨달은 계기
金,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심적 충격 드러내



올해의 한반도 정세는 지난해의 ‘평화 모드’와는 사뭇 다릅니다. 지난 2월말엔 베트남 하노이에서 미국과 북한이 2차 정상회담을 열었다가 결렬됐습니다. 지난 4월 25일엔 북한이 김정은 체제 출범 후 처음으로 러시아와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4·27 판문점 선언’ 1주년은 초라하고도 조용히 지나갔습니다.

한국경제신문은 한반도를 둘러 싸고 새로운 판 짜기가 시작된 지금, ‘지구에서 가장 폐쇄적 세계’으로 손꼽히는 북한을 직접 가까이에서 경험했거나 바라본 인사들을 만나 릴레이 인터뷰를 시작합니다. 첫 번째 인터뷰이는 2016년 8월 한국에 망명한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공사입니다.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이 결국 대북제재에 참지 못하고 조급한 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중국이고 러시아고 쑤시고 다녔지만 소용 없어요. 본인이 어리단 걸 증명했을 뿐입니다.”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공사(56)는 북한이 최근 미국, 중국에 이어 러시아와도 관계 정상화에 나선 데 대해 이 같이 말했다. 그는 “김정은은 올해 상반기엔 중국과 러시아를 자기 우군으로 확보하며 대남 비난전을 지속할 것”이라며 “하반기 들어 미국과 한국을 향해 ‘미소 외교’ 전략으로 돌아설 것으로 본다”고 예상했다. 인터뷰는 지난 4월 22일 한국경제신문 본사 방문, 이후 수시 연락 방식으로 진행됐다.

▶‘하노이 회담’의 실패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왜 그걸 실패했다고 보세요? 전 아주 성공한 회담이라고 봅니다.”

▶어떤 점에서 성공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미국과 북한이 서로 회담을 준비하면서 뭘 생각해 왔는지 확실하게 알았거든요. 협상에서 상대방의 의중을 명확히 꿰뚫는 것이야말로 대단한 성과입니다. 북한은 미국이 원하는 비핵화가 단순히 영변 핵시설 파괴가 아니라 ‘플러스 알파’가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미국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강도가 자체 예상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것도 목격했고요. 미국은 북한이 핵 포기 의사가 없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또 대북제재가 북한을 아주 힘들게 하고 있고, 그 기조를 유지해야 북한이 협상에 나서리란 걸 직접 봤어요.”

▶김정은으로선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을 텐데요.

“엄청나죠. 지금까지 ‘최고지도자는 틀리지 않는다’는 게 김씨 왕조 우상화의 최우선 원칙이었는데 이게 깨졌으니까요. 당장 하노이로 출발했을 때와 돌아왔을 당시의 노동신문 보도 내용이 다르잖아요. 하노이에서 돌아왔을 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회담했다는 소식이 없어요.”

▶지난 4월 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도 그런 측면에서 봐야 겠군요.

“맞아요. 여기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은 북한 주민들에게 마치 성경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매년 나올 때마다 달달 외워야 해요. 이 때문에 북한 최고지도자들은 이 연설에 절대 자기 감정을 담지 않습니다. 주민들이 성경처럼 외워야 하는 문장을 가벼이 쓸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김정은 이번에 시정연설에서 미국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나’라는 주어를 썼습니다. 김일성, 김정일 때는 볼 수 없던 모습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오지랖 넓은 중재자’라 표현한 것도 예전 같으면 볼 수 없을 일인가요?

“그럼요. 시정연설에 누가 ‘오지랖 넓은’ 같은 경박한 표현을 씁니까. 그만큼 한국에 대한 섭섭함이 컸던 것 같습니다. 미국과 정상회담이 잘 안 됐다는 개인적 좌절감도 있었겠죠. 김정은이 이렇게 자기 감정을 그대로 나타내는 건 협상 상대에게 좋은 카드를 주는 셈이죠.”

▶북·러 정상회담 결과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니까.

“러시아와는 톱 다운 방식으로 회담을 준비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외무성의 러시아 담당 부상이 미리 블라디보스토크에 갔잖아요. 이번엔 아무래도 첫 만남인 만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친분을 쌓고, 원하는 걸 얻기 위한 준비 단계를 밟았다고 봅니다.”

▶북한은 러시아로부터 무엇을 얻고 싶어합니까.

“기름과 식량, 그리고 해외노동자 체류기한 연장입니다. 푸틴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혜택을 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북한 언론들이 북·러 회담에 대해 ‘당면한 협조 문제들을 진지하게 토의하고 만족한 견해 일치를 봤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아마 주민들에겐 이를 통해 희망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요즘 북한의 외교라인에서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은 최선희입니다.

“최선희는 직책상으로는 외무성 제1부상입니다. 그런데 실질적 위상은 이용호 외무상을 훨씬 앞서는 것 같습니다. 김정은과 접근성이 훨씬 좋아 보여요.”

▶왜 그렇다고 보십니까.

“김정은이 유년 시절을 스위스에서 보내서 평양에 자기 친구들이 없어요. 곁의 관료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시절부터 활약해 온 노인들이고, 자기 또래 중엔 친구가 없죠. 그렇다 보니 본인의 의견이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으로 부인 이설주와 여동생 김여정, 예술·선전 분야에선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장, 외교 분야에선 최선희가 꼽힌 것 같아요.”

▶올해 최고인민회의 인사에서 나타난 가장 큰 특징은 무엇입니까.

“김정은이 예측 불가능한 인사발령을 선호한다는 겁니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최고인민회의 인사를 보면 같은 분야에 1년 이상 동일 인물을 두지 않아요. 정신없이 왔다갔다 하게 만들면서 업무에 익숙해질 시간을 주지 않아요. 과거엔 이런 사례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김정은이 관료들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죠.”

▶최근 반북(反北) 단체 ‘자유조선’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단체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국내에서 이 단체와 접촉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기관은 없어 보여요. 다반 반북단체 중 처음으로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서 폭력노선을 강조했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이 단체의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글을 보면 내부나 주위에 중년 이상의 인물이 있어 보여요. 특히 선언문을 보면 북한 내부에 대해 잘 아는 인사가 개입돼 있는 것 같습니다.”

▶남북, 미·북 정상회담은 언제쯤 다시 열릴까요.

“지금으로선 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북제재는 우리에게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정부가 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미국과 중국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당분간 북한을 향해 아무 메시지도 보내지 않을 것이라 예상합니다. 정중동(靜中動) 속 신경전이 이어질 겁니다.”

■ 태영호 前 북한공사는…

2016년 8월 한국으로 망명한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공사는 탈북 외교관 중 최고위급에 속한다. 특히 북한과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서로 대사를 파견할 정도로 가까운 관계인 영국에서 발생한 북한 외교관의 탈북은 당시 세계 외교가를 발칵 뒤집히게 한 사건이었다.

태 전 공사는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하며 덴마크어 구사도 가능하다. 서유럽 분야를 담당하는 북 한 외무성 8국 소속으로 덴마크, 스웨덴, 영국 등지에서 근무했다. 지난해부터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 일하다가 올 5월 사퇴 후 프리랜서로 일하며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저서 '3층 서기실의 암호'는 남북한 정상회담, 미·북 정상회담과 맞물려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는 “두 아들에게 북한 체제 노예의 사슬을 끊어주고 싶었다”고 망명 동기를 밝힐 정도로 가족애가 지극하다고 알려져 있다.

△1962년 평양 출생 △평양 국제관계대학 국제관계학 △북한 외무성 8국 배치 △주덴마크 북한대사관 서기관 △주스웨덴 북한대사관 서기관 △주영국 북한대사관 공사 △2016년 8월 한국으로 망명△국가안보전략연구원 특임전략자문위원(2017~2018년 5월)

글=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사진=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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