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임정 百주년](26) 일제 향해 총구 겨눈 여성 운동가

입력 2019-02-13 06:00   수정 2019-02-13 06:19

[3ㆍ1운동.임정 百주년](26) 일제 향해 총구 겨눈 여성 운동가
의병장부터 광복군까지…윤희순·남자현·김마리아·김경희
독립유공자 중 여성은 2% 불과…"정부, 공훈 인정 인색" 지적도

(서울=연합뉴스) 김호준 기자 = "코리아에서는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여성과 소녀가 (항일)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너도 틀림없이 깊이 감동할 것이다."
인도의 독립 영웅이자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는 1932년 12월 30일 감옥에서 자신의 딸에게 쓴 편지에서 "일본인이 한민족을 억압한 것은 역사상 보기 드문 쓰라린 암흑의 일막"이라고 평가하면서 일제에 대항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을 이렇게 전했다.
여성 독립운동은 1895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와 단발령 조치에 항거한 의병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 지도자인 윤희순(1860~1935) 선생은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 구별이 있을 수 없다"며 의병에 참여했다.
선생은 을미의병 때 '안사람 의병가' 등을 지어 항일의식을 고취했고, 1907~1908년 정미의병 때는 여성들로 구성된 의병단을 별도로 조직해 활동했다. 여성의병단은 우리나라 여군의 시초로 평가된다.
1911년 남편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한 선생은 노학당, 조선독립단 가족부대, 조선독립단 학교 등을 설립, 운영하면서 항일 운동가 양성에도 힘썼다. 1932년 무순 항일운동이 일본군에 발각되자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리는 남자현(1872~1933) 의사도 을미사변 이후 의병에 참여했고, 3·1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해 항일무장조직인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했다. 남 의사는 1925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을 계획하고, 1933년 만주국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 암살을 시도해 '여자 안중근'으로도 불렸다.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연기한 '안옥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의 모친인 조마리아(1862~1927) 선생은 1909년 안 의사가 일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후 수감되자 정근·공근 두 아들을 따라 연해주로 망명했다.
선생은 1922년 상하이로 이주해 둘째 정근과 함께 지내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창립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후원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 출신인 김경희(1888~1919) 선생은 1913년 박정석·황에스터 선생 등과 함께 최초의 여성 독립운동단체로 평가되는 송죽결사대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여학생들을 모아 구국기도회를 개최하고 국외 독립운동기지에 군자금을 보내는 등의 활동을 했다.

김마리아(1903~?) 선생은 3·1운동의 기폭제로 평가되는 도쿄 2·8독립운동에 참여한 뒤 비밀리에 국내에 입국해 여성들의 3·1운동 참여를 독려하다가 학생 독립운동의 배후로 지목돼 수감됐다. 출감 이후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해 임시정부 군자금 지원 등의 활동을 벌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비행사로 활약한 권기옥(1903~1988) 선생은 숭의여학교 재학 중 3·1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이후 평남도청 폭파사건에 관여한 혐의로 일제에 쫓기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조선총독부를 공중에서 폭격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1923년 중국 남서부의 윈난육군항공학교에 입학해 훈련을 받은 뒤 중국 공군에 입대해 항일전선에서 싸웠다.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의 딸인 지복영(1920~2007) 선생은 1924년 가족과 함께 지 장군이 활동하는 만주로 떠나 지린성, 난징, 광저우 등지로 옮겨 다니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특히 1939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가했고, 1940년 9월에는 여성의 몸으로 광복군에 입대해 기관지 '광복' 발간, 적정 탐지, 광복군 모집, 대적 한국어 방송 등의 활동을 벌였다.
역시 광복군 출신인 오희옥 선생의 경우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자신에 이르기까지 3대(代)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선생은 언니인 오희영과 함께 1934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해 첩보를 수집하고 일본군 내 한국인 병사를 탈출시키는 등 광복군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남성 독립운동가보다 더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가정에선 며느리, 주부, 아내, 어머니로서 시부모 봉양, 자녀 양육, 가사 등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지금까지 포상을 받은 독립유공자 1만5천180명 중 여성은 357명으로 2%에 불과해 과거 정부들이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공훈인정에 인색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남녀차별 의식 때문에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동에 관한 공식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것도 공인 여성 독립유공자가 적은 이유로 꼽힌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국가보훈처 예산 중 보상금을 포함한 독립유공자 관련 예산은 3% 미만"이라며 "게다가 기록 중심으로 공훈을 평가하다 보니 (기록 부재로 인해) 정량적 평가가 어려운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보훈처는 이와 관련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 연구용역을 추진해 여성 독립운동가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겠다"며 "아울러 공적 미달 등의 사유로 포상이 보류된 여성 독립운동가도 개선된 포상 심사기준 적용 가능 여부를 조사해 포상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hoju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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