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한국 LPG자동차의 역사④-올림픽이 만든 중형 LPG

입력 2016-01-29 08:40  


 액화석유로 불리는 LPG가 국내에서 자동차 연료로 사용된 때는 1960년대 후반이다. 특히 한국에서 LPG가 본격 생산된 이후 개조를 통해 자동차에 사용됐고, 이후 1970년대 LPG 연료가 택시에 사용될 수 있도록 법적 정비가 완료된 후 1982년 자동차회사가 LPG 전용 엔진을 처음 만들어 판매했다. 그러니 한국 내 LPG자동차의 역사도 벌써 50년이 훌쩍 넘은 셈이다. 덕분에 LPG엔진 기술은 한국이 글로벌 최고 수준으로 평가된다. 이에 본지는 그간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LPG자동차의 한국 내 역사를 정리해 보려 한다<편집자>. 

 1982년 5월, 현대차는 마크V LPG를 전격 출시했다. 코티나 마크V 이코노미에 대체연료인 LPG를 사용해 기존 디젤택시에 비해 월 9만원 정도의 연료비를 절약할 수 있다고 홍보하며 중형 LPG 시대를 개척했다. 게다가 자동변속기를 달아 운전이 미숙한 사람에게 인기를 끌었다. 그러자 당시 고급차 로열(Royal)을 앞세워 마크V와 경쟁하던 새한자동차도 로열에 LPG 엔진을 탑재해 그해 8월 중순부터 맞불을 놨다. 가격은 715만원으로, 마크V보다 조금 비쌌지만 중형 고급차는 새한자동차가 현대자동차를 앞서 있었던 만큼 둘의 경쟁은 치열했다.

 그런데 LPG자동차가 소형에서 서서히 중형으로 바뀔 조짐을 보였다. 1986년과 1988년 열린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때문이었다. 1981년 11월 아시안게임 총회에서 한국은 1986년 아시안게임 유치를 확정했다. 이에 앞서 당시 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이끄는 올림픽게임 유치단이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또한 감격적으로 따냈다.

 그러자 정부는 두 대회를 열기에 앞서 한국을 찾는 외국인에게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택시의 중형화를 추진했다. 당시 택시는 소형 포니가 주종을 이뤘던 만큼 중형은 흔치 않았는데, 1982년 11월 당시 국내 중형 택시는 201대에 불과했고, 이 가운데 새한자동차의 로열 LPG와 디젤이 164대로 전체의 82%를 차지했다.

 이후 현대차는 마크V 외에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대비한 영업용 중형 택시 개발에 본격 착수했다. 이후 3년의 개발 기간을 거쳐 내놓은 1983년 내놓은 차종이 바로 '스텔라(Stella)'다. 현대차는 스텔라 LPG와 승용을 내놓으며 연료소모가 소형택시와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집중 내세웠다.

 사실 스텔라로 알려진 'Y카'는 1978년 현대가 이탈디자인 주지아로에 의뢰해 스타일을 완성한 제품이다. 4년간 270억원이 투입된 Y카는 당시 불황과 적자에 시달리던 현대 입장에선 애초부터 무리한 계획이라는 비판이 많았고, 중형차는 품질의 고급화를 이뤄내야 하기에 내부적으로 과연 이 계획이 가능하겠냐는 비관적인 전망도 뒤따랐다. 

 그럼에도 현대가 중형차를 개발키로 한 것은 포드와의 기술제휴로 생산한 코티나 시리즈에서 당한 뼈아픈 기억 때문이다. 1969년부터 생산이 시작된 코티나 시리즈는 우리 고유모델이 아니었던 이유로 포드측의 모델변경 요구에 수동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80년까지 모델 평균 수명이 3년을 넘기지 못하는 처지였다.

 이에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포드의 기고만장함에 더 이상 끌려 다닐 수 없다는 의지를 나타냈고, 현대로 하여금 독자 개발이라는 길을 걷게 했다. 그 결과 마침내 1983년 1월 Y카가 등장했다. 물론 섀시 면에서도 이론적으로 가장 우수한 매커니즘을 채택했을 뿐 아니라 국내의 기후, 도로조건 및 운전자의 습관과 성격 등을 고려한 종합적인 개념이 적용돼 안전도와 성능은 물론 내구력에서도 크게 돋보였다. 이밖에 직접 접착식 전후면 유리, 일체성 형식 천장 및 도어 트림, 특수조절이 가능한 고급시트 등 각종 최신 매커니즘과 엔지니어링을 과감하게 도입해 품질 고급화에 커다란 성과를 거뒀다(현대자동차의 힘, 명성출판사 2005)

 출시되자마자 스텔라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계약을 시작한 6월 1일 이후 3개월 만에 계약고가 이미 1만대 수준을 넘어 생산이 도저히 주문을 따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좋은 일에는 언제나 운이 따르지 않는다고 했던가. 잘 나가던 스텔라였지만 급박한 생산일정으로 결함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포드와의 계약만료를 의식해 양산일정을 무리하게 잡다보니 완성차 테스트에 완벽을 기하지 못했던 탓이다. 이로 인해 소비자들의 불만은 높아갔고, 신뢰 또한 추락했다. 심지어 출고 후 3-4개월이 지나면서 화재발생, 소음, 볼 조인트 소켓 불량, LPG 택시 가스배관 위치 등 품질 결함이 한꺼번에 드러나 리콜 캠페인을 벌여야 했다.

 이 때 현대가 가장 곤욕을 치른 사건이 하나 벌어진다. 차 속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한 것이었는데,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현대는 차량을 정밀 조사해 그 원인이 전기 합선에 있음을 알아냈다. 이에 따라 83년 겨울 이미 판매된 스텔라 1만5,000여대의 대규모 리콜을 실시해 배터리 배선을 개선했다. 하지만 이미 품질로 인한 소비자들의 신뢰는 추락한 상태였다. 결국 스텔라는 84년 내내 월 판매량이 1,300여대를 맴돌며 현대에게 아픈 상처를 남기는 애물 차종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85년 배기량을 100cc 높인 스텔라 CXL을 4월에 내놓으며 반전에 성공했다.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중형차 성격을 가졌던 스텔라는 아펙스(APEX), GL, GX 등이 추가되며 삽시간에 국내 중형차 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하게 된다.

 물론 경쟁사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새한자동차를 인수한 대우자동차 김우중 회장은 인기가 많던 중형차 로열 시리즈로 현대차를 겨냥했다. 1987년 대우차는 중형 택시 전용 로열을 개발했다. 대우차가 1987년 내놓은 9개의 로얄시리즈 중 LPG는 듀크 트림에 달렸는데, 스텔라보다 고급차로 인식돼 나름 인지도를 확보했다. 배기량은 1,600㏄였으며, 소형 LPG인 맵시나 시그마와 함께 포니와 스텔라를 위협했다. 또한 기아산업도 중형 택시를 개발해 LPG 시장에 진출했다. 기아의 중형 택시는 콩코드로, 1981년 공업합리화조치 때까지 브리사로 택시 시장 점유율을 높였지만 1988년 콩코드 1.8ℓ LPG를 개발해 현대차와 대우차가 양분한 중형 택시 시장에 진출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중형 LPG차의 등장은 정부의 의지에 따라 추진됐다. 1987년 교통부는 올림픽이 열리기 전까지 1만대의 중형 택시 운행을 허용하기로 했는데, 대상 차종은 1,600㏄급 이상이었다.

 한편, 이때까지 LPG 엔진은 모두 믹서 방식이었다. 믹서 방식은 액체 상태의 LPG를 기화시킨 뒤 공기를 혼합해 연소실로 분사하는 것으로, 연소율이 높지 않았다. 게다가 겨울철 낮은 온도에서 기화가 되지 않아 시동 불량 문제가 발생하는 단점도 적지 않았다. 또한 액상 연료를 기화하는 과정에서 타르가 침전돼 주기적으로 타르를 제거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발생했다. 이에 따라 LPG업계는 차세대 엔진 개발의 필요성을 절감, 엔진 개선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단순히 자동차회사가 아니라 LPG 업계가 앞장 서 기술개발에 나선 셈이다(계속).

 권용주 기자 soo4195@autotimes.co.kr

▶ [연재]한국 LPG자동차의 역사③-LPG 택시의 확산
▶ [연재]한국 LPG자동차의 역사①-도입의 시작은 버스
▶ [연재]한국 LPG자동차의 역사②-LPG택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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