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빌리 강&제니 강, 2평 남짓 방에서 기적을 일궈내다

입력 2017-01-11 17:11  


[허젬마 기자] 첫만남에 서로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두 남녀가 있다. 둘은 서로가 평생의 동반자가 될 거라는 확신으로 함께 인생이라는 아름다운 여정에 올라탔다. 2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유효한 이 이야기는 단순한 로맨스로 끝나지 않는다.

가진 것 없이 두 평 남짓한 공간에서 둘이 힘을 모아 일으킨 사업은 현재 수천 평 규모의 본사 공장을 비롯해 전세계 8개국에 글로벌 소싱 체제를 갖춘 굵직한 기업으로 일궈냈다. 시작은 미미했지만 그 끝은 창대하리라. 글로벌 패션 브랜드 로빈케이 인터내셔널(이하 로빈케이)의 이야기다.

시작부터 참 궁금한 게 많은데요. 먼저 회사 소개를 부탁 드릴게요.

빌리강 대표) 처음 브랜드가 만들어진 배경 설명을 위해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볼게요. 미국에는 한국의 동대문 같은 자바(jobber market)라는 시장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동대문과 마찬가지로 옷가게를 하는 사람들이 와서 도매로 물건을 떼다가 소매로 판매하는 방식으로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이에요.

당시 저는 세일즈 회사에 근무하며 자바 시장에 있는 작은 의류 업체들을 메이씨스나 노드스트롬 백화점과 같은 메이저 시장과 연결해주는 중간다리 역할을 했어요. 쉽게 말해 일반 도매업자와 소매업자를 연결해주는 중간 에이전트 역할을 맡았던 거죠. 당시만해도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어요. 한인으로서는 아마 제가 첫 번째까지는 아니더라도 초창기 멤버라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때 당시는 그 일이 현재의 기업체를 일구는 기반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일했다는 빌리 강 대표. 그러던 어느 날 대학 졸업 후 디자이너로 일하던 아내(제니 강 대표)가 자신의 비즈니스를 하고 싶다고 말해왔던 순간을 떠올렸다.

2004년도 초 무렵이었을 거예요. FIDM(Fashion Institute of Design & Merchandising)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한 후 회사를 다니며 디자이너로 일하던 아내가 자신의 비즈니스를 해보고 싶다고 말해왔죠. 충분한 상의 끝에 제가 몸담고 있던 세일즈 회사와 제니가 원했던 디자인 회사를 합치게 됐어요. 그 시작이 현재 로빈케이의 모태가 된 거죠.

회사가 현재의 규모를 갖추기까지 걸어온 과정이 궁금해져요.

빌리강 대표) 요즘 금수저다, 다이아몬드 수저다 이런 표현들이 있더라고요. 저희는 그런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어요. 제가 처음 미국에 건너갈 때 정말 손에 50불 들고 갔거든요. 아내 역시 평범한 유학생일 뿐이었죠. 당시 수중에 있는 돈을 다 끌어 모아보니 한국 돈으로 약 한 1800만원 정도였는데 그 돈이 저희가 가진 전부였죠.

제니강 대표) 처음 사업을 시작한 공간이 2평 반 남짓 됐었는데 사실 그것도 당시 거래처 봉제공장 사장님께 남는 뒷방 하나를 부탁해서 얻어 쓴 공간이었어요. 그 작은 공간에 옷 만드는 데 필요한 기계 3대를 두고 시작하게 된 거죠. 패턴부터 시작해 모든 생산 과정을 다룰 줄 알았기 때문에 파트 타임으로 샘플 메이커 한 분 모셔다 놓고 제가 모든 걸 도맡아 진행하기 시작했어요. 디자인을 그리고 패턴을 뜨고 생산까지 마치고 나면 그 이후에는 저희 사장님 손으로 넘어가는 거죠.

빌리강 대표) 아내가 디자인을 한 뒤 샘플을 만들어놓으면 저는 그걸 바이어들에게 보여주고 오더를 받아 생산이 이루어지게끔 했어요. 완성된 옷들을 아내가 포장까지 해놓으면 저는 꼭두새벽에 렌트한 트럭을 몰고 한 시간, 두 시간 되는 거리에 배송을 다녀온 뒤 낮에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일을 했죠.


강한 열정이 마음에 아로새겨진 것일까. 두 대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을 듣는 듯 생생하게 그려졌다. 물론 누구나 그러하듯 사업 초반에 큰 시행착오도 겪었다. 사업을 시작하고 받은 첫 주문 건에서 제품을 다 생산해놓고 보니 옷의 사이즈가 줄어드는 실수가 발생한 것. 생산한 의류에 들어있던 스판 소재 때문이었다.

주니어 의류를 주문한 거래처는 다 작아진 옷을 보며 주니어가 아닌 아기 옷을 가져왔다며 난색을 표했다. 가장 큰 사이즈만 남겨둔 채 나머지는 반품 처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가진 돈 거의 전부를 투자한 주문이었으니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터. 발을 동동 거리며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있는 아내를 달래며 빌리 강 대표는 방법을 강구했다. 결국 땡처리 업체에 원가 그대로 제품을 넘겨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그들에게는 첫 번째 커다란 레슨이 된 셈이다.

첫 번째 실수 이후 욕심 부리지 말고 제대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세웠다. 이후 8개월 동안 옷 한 벌당 50원, 100원 남는 옷들을 대략 20-30만장을 생산해내며 실력을 갈고 닦았다. 꼭두새벽부터 일을 시작해 주말도 없이 그야말로 불철주야 일에 매달린 둘. 그쯤 되자 좀 더 큰 회사와 붙어봐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큰 회사들로부터 제니 강 대표의 옷들이 셀렉되기 시작하면서 주문량도 한번에 몇 천장씩 들어왔다. 2평 반에서 시작한 공간은 어느새 4평으로, 60평으로 곧 이어 200평으로 늘려가게 되었다. 그렇게 승승장구 할 줄로만 알았던 그 즈음, 그들에게 다시 한번 좌절이 찾아왔다.

빌리 강 대표) 2006년도 말에서 2007년쯤이었어요. 미국에 심각한 불황이 찾아왔죠. 리만 브라더스와 골드만 삭스 사태가 연달아 터지면서 많은 회사들이 파산 위기에 놓였어요. 저희라고 예외는 아니었죠. 함께 일하는 봉제 공장이나 다른 협력 업체들도 회사 실정이 점차 힘들어지면서 결과적으로 제품의 질이 점점 떨어졌어요. 나라에 닥친 불황은 회사의 경영을 흔들어놓았고 값싸게 생산한 제품들의 퀄리티가 떨어지니 저희 역시 고객사로부터 오더가 줄어들고 제품 캔슬이 잦아지게 되었죠.

그러다 2007년 12월18일날. 날짜도 선명히 기억되는 그 날, 10억 돈 가까이 되는 오더를 캔슬 당했어요. 그리고 저는 이제 그만 문을 닫기로 마음 먹었죠. 더 이상은 버틸 재간이 없더라고요. 그 전부터 계속해서 캔슬과 리턴이 반복되던 상황이었고 마지막 실낱 같은 희망으로 버티던 거액의 주문을 취소 당하고 나니 '아, 이제는 정말 문을 닫아야겠구나' 싶더라고요. 12월 18일 날짜도 좋잖아요. 이번 달만 지나면 한 해도 끝이 나니 문을 닫자. 사실 일 년 동안 너무 힘들었었거든요. 일년 내내 매달 돈을 까먹고 있었어요. 그래도 우리는 약속을 지켜야 하니까 우리와 함께 일하는 거래처나 직원들에게 단 한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어요. 그만큼 회사의 부담이 깊어졌던 거죠.

당시 저희에게 남은 돈이 약 3만불 정도 됐었는데 회사 문을 닫으면 가족끼리 어디 여행이나 다녀오자고 했어요. 지금까지 고생했으니까 남은 돈으로 여행이나 다녀와서 새로 직장을 구하자고요.

그렇게 마음을 먹은 뒤 어느 날, 자려고 누웠는데 천장에 몇 안 되는 우리 직원들 얼굴이 하나씩 보이는 거예요. 마치 슬라이드처럼요. 이미 많은 직원들이 그만 둔 상태였는데 몇 안 되는 직원들이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그 순간 도저히 이대로는 문을 못 닫겠더라고요. 바로 아내에게 얘기했죠. 우리 여행 가려던 거 가지 말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붙어보자고. 안 되면 그냥 바로 다른 일을 구하자는 심정으로요. 그래서 결국 마지막 남은 그 돈을 마저 또 집어넣은 거예요. 그때가 2008년도1월 말, 2월 초쯤이었어요.

어려운 회사 사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곁에 남아준 직원들을 차마 저버릴 수 없었던 빌리 강 대표.  마지막으로 심기일전하여 용기를 밀어 부쳤던 그 시기, 뜻밖의 수확을 얻게 된다.

빌리 강 대표) 2,000개 정도 가게를 소유한 큰 회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2주만에 옷 2만장을 만들어줄 수 있느냐고 물어왔죠. 가능하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는데 사실 막막했어요. 옷을 만들려면 원단을 먼저 수급해야 하는데 경기가 어려워지기 전에는 신용으로 거래가 가능했지만 당시 이미 너무 많은 회사들이 문을 닫는 실정이다 보니 현찰로 돈을 싸가지고 가야지만 원단을 주는 상황이었어요.

2주 안에 옷을 만들려면 3일 안에 원단이 다 들어와야 납품 기일을 맞출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현금을 주고 원단을 살 여유가 없었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연락을 했는데 돈을 싸 들고 가야지만 원단을 보내주는 회사들이 저를 믿고 하룻밤 사이에 원단을 모두 보내준 거예요.

덕분에 다행히도 기일을 맞춰 거래처에 주문량을 납품할 수 있었고 그러고 나니 다시 또 2만장의 추가 주문을, 또 그 이후에는 4만장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죠. 그때부터 다시 회사 사정이 나아지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계속 치고 올라오게 된 거예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이 자주 쓰는 단어에 귀 기울이라는 말이 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두 대표가 각각 반복해서 쓰는 말이 있었으니 빌리 강 대표는 '신용'을, 제니 강 대표는 '퀄리티'를 거듭해 강조했다. 회사의 성장이 끄덕여지는 대목이었다.

제니 강 대표) 저 같은 경우는 처음에 바닥부터 시작해서 차츰차츰 올라오게 되다 보니 옷에 대한 애착심이 남달라요. 저희 팀들에게도 항상 퀄리티 부분을 힘주어 강조하죠. 손님들에게 좋은 가격으로 좋은 퀄리티의 상품을 드려야 하는 게 제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퀄리티를 보장하는 것은 하나의 약속이에요. 스타일은 당연히 좋아야 하는 거고요. 퀄리티는 얼만큼 신경 쓰느냐에 따라 확연히 차이가 나거든요.

사실 작년, 재작년 바이어들이 원하는 가격이 계속 떨어지고 있어요. 바이어들이 원하는 가격에 맞추다 보면 저희가 판매하는 가격도 떨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사실 퀄리티를 건드릴 수밖에 없어요. 이윤을 남겨야 하니까요. 하지만 저는 항상 직원들에게 강조해서 이야기해요. 가격이 떨어져도 퀄리티는 흔들리지 않게 항상 조심할 것. 그 약속만큼은 반드시 지켜드릴 수 있어요.

빌리 강 대표) 한 가지 더 첨언을 하자면 저희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건 신용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우선으로 해요. 작년에 미국에서 가장 큰 항구인 롱비치 항구에서 큰 대모가 있었어요. 노조 파업으로 항구가 막혀 배송율이 60-70% 대로 떨어졌죠. 그러나 저희는 그 당시 97% 이상 제 날짜에 다 납품을 했어요. 대모가 시작됨과 동시에 모든 제품의 배송을 항공 체제로 바꿨거든요. 돈은 많이 날렸죠. 하지만 신용은 챙길 수 있었던 거죠.

노드스트롬 백화점 안에도 수백 개, 수천 개의 협력 업체들이 있는데 저희가 그 많은 업체들 사이에서 탑 5를 유지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신용도 덕이라 생각해요. 소비자들에게는 옷의 퀄리티를, 거래처에게는 신용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게 저희 회사의 철칙이라 할 수 있죠.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인터뷰를 이끌어가는 두 대표의 말에는 강한 신념이 깃들어 있었다. 정직한 비즈니스, 건강한 비즈니스, 깨끗한 비즈니스 등 사업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표현일 수도 있는 말도 그들에게는 무척 편하고 당연해보였다. 가만 들어보니 그들은 긴 인터뷰 내내 성공이라는 표현은 운운하지 않았다. 다만 끊임없이 성장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었다.

자신들의 회사가 성장할 수 있었던 직원들을 이야기할 때는 직원이기 이전에 '모두가 평등한 인격체' 라는 표현으로 그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하물며 성장의 기회를 내어준 나라에게 몫을 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나라에서 번 돈은 그 나라에 환원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 기업의 이념임을 밝히면서.

인터뷰가 마무리될 즈음이 되니 이 두 사람, 무슨 일을 했어도 성공했겠다 싶다. 안으로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제품의 최상의 퀄리티를 내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밖으로는 이들을 믿고 함께 일하는 수많은 협력사들의 신용을 최우선으로 두는 기업의 철칙은 뿌리 깊은 나무를 연상시켰다.

“저는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속담을 항상 마음에 지니고 살아요. 사자성어로는 ‘인과응보’가 되겠죠. 오늘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 내일 일어나는 일을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인 거죠. 내가 오늘을 바르게 살면 내가 내일 그에 대한 상을 받을 것이고 혹여 내가 못 받더라도 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돌아가게 될 거라고요. 반대로 내가 오늘을 잘못 살면 내일 그에 대한 벌을 받을 거고요”

이어서 제니 강 대표는 “저는 저희 아이들한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고 싶어요. 언젠가 제 생애를 끝내는 순간이 오는 날, 아이들로부터 ‘엄마, 엄마는 정말 자랑스러운 엄마였어’ 라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게 저의 간절한 바람이에요. 제가 정직하고 깨끗한 비즈니스를 강조하는 이유인 거죠”

그들은 분명 눈앞의 나무가 아닌 전체적인 숲을 바라보며 정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강한 신념으로 더 먼 곳을 바라보는 중이다. 한국을 거점으로 일본,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는 게 첫 번째 목표다. 그리고 조금 더 먼 미래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할만한 명품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밑그림도 작업 중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두 대표는 한국 그리고 한국인의 가능성과 저력을 설파하며 그 믿음을 비춰 보였다. 그리고 기자의 눈에는 그 믿음을 몸소 실천해 보이고 있는 두 사람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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