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피아노가 살아있다?

입력 2020-02-10 17:55   수정 2020-02-11 00:03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기 종류는 상상보다 많다. 특히 타악기의 종류는 무한대다. ‘두드려서 소리가 나는 것은 모두 타악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목관악기들을 살펴보면 각 악기와 연관된 ‘친척’이 보통 많은 게 아니다. 관악기 중 구슬픈 소리를 내는 오보에만 보더라도 오보에 다모레, 잉글리시 호른, 헤겔폰 등 ‘대가족 집안’이다.

각자의 역할과 색깔이 다르지만 이 모든 악기는 공통점을 지녔다. 우선 성격이 아주 섬세하고 예민하기 짝이 없다. 날씨가 조금만 습한 날이면 답답한 코맹맹이 소리를 낸다. 특히나 현악기 연주자들은 습도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연주를 앞두고 습한 날씨에 걸리면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다.

뉴욕타임스에 소개까지 된 악기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세계 최고 바이올리니스트인 막심 벤게로프가 어렸을 때 미국의 한 유명 여름 음악제에서 독주회를 했다. 마침 폭우로 인해 습도가 아주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악기 소리는 목이 쉰 것 같은 허스키한 소리를 냈다. 관중석에 있던 그의 어머니가 참다못해 휴식시간에 대기실로 뛰어 들어갔다. 어머니는 바이올린을 잡고 간절히 기도를 했고, 후반부의 연주가 시작됐을 때 갑자기 그의 악기는 명료하고도 우렁찬 소리를 냈다고 한다.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겠지만 나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악기가 살아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살아서 숨 쉬면서, 자신을 만져주는 주인의 손길대로 소리를 내주는 것이다. 진심의 손길을 보낼 때는 가장 설득력 있는 소리로, 거짓 손길을 보낼 때는 가식적인 소리로 말이다. 그래서 피아노를 만날 때는 마치 신부님 앞에서 고해성사라도 드리는 것처럼 경건하고 솔직하게 된다.

지휘를 시작한 지 십수 년이 넘었지만 역시 피아노 앞에 앉아 내 손으로 직접 건반을 만지면서 악기와 소통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지휘자는 자기 손으로 한 음도 직접 연주하지 못한다’라는 말을 누구보다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조금만 더 일찍 내 손으로 악기를 다루는 작업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지 못했을까’하는 아쉬운 마음이 크지만, 지금부터라도 한순간 순간을 소중하고 의미 있게 건반을 만나려 한다.

건반과 더불어 영혼이 깃든 진심의 소리를 추구하며 많은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고 싶다. 이 세상 아무도 모르는 나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88개의 건반과의 만남. 상상만 해도 설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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