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의 논점과 관점] 홍콩사태가 보여준 386의 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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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06-02 18:03   수정 2020-06-03 00:18

[백광엽의 논점과 관점] 홍콩사태가 보여준 386의 위선

35년 전인 1985년 5월. 386세대의 진격을 예고하는 ‘거사’가 터졌다. 서울 5개 대학 소속 대학생 73명이 미국 문화원을 기습점거하고 사흘간 농성에 돌입한 것이다. ‘광주 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사과하라’는 요구가 내걸렸다.

당시 언급조차 조심스럽던 광주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감행된 거사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 국내를 넘어 전 세계에 386의 등장을 알렸고 5·18 논의는 ‘공론의 장’으로 편입됐다. 주동자 김민석은 불과 11년 뒤 서른둘에 금배지를 달고 ‘386 정치’의 선두주자가 됐다. 함운경 허인회 박선원 고진화 등도 차례로 정치권에 입문했다. 이후 ‘오월 광주’는 386 정치인의 든든한 자산이자 마음의 빚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홍콩 사태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침묵은 386 정치의 바닥을 보여주는 것이다. 386의 위선을 목격하는 일이 처음은 아니다. 안희정·김의겸·조국·윤미향 사태에서도 한 줌 권력을 사유화하고 부당이득에 집착하는 타락이 극명했다. ‘아군’이라며 맹목적으로 감싸는 괴물 같은 비이성적 집단의 존재도 확인했다.

'광주 판박이' 홍콩사태 외면

하지만 홍콩 사태 외면은 그런 개별적 일탈이나 집단적 품성 문제를 뛰어넘는 다른 차원의 일이다. 오늘 홍콩은 386 정체성의 알파요 오메가인 ‘오월 광주’의 판박이이기 때문이다. 2047년까지 일국양제와 고도의 자치권을 보장하겠다던 약속을 저버린 중국 정부의 전체주의적 폭주를 막기 위해 홍콩 시민들은 거리로 나섰다. ‘서울의 봄’을 악몽으로 몰고간 신군부에 맞서 가두투쟁을 벌인 한국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홍콩인들이 시위 현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자주 틀고 한국에 연대를 요청하는 배경이다.

더구나 시위의 계기는 중국의 홍콩 국가보안법 밀어붙이기다. 국내 국가보안법 폐지까지 주장해 온 진보진영으로서는 홍콩을 지지해야 할 이유가 넘치는 셈이다. 그런데도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조하는 현 정부는 1년이 지나도록 묵묵부답이다.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와 유럽연합 주요국이 홍콩 지지를 선언한 것과 대조적이다. 일본 자민당조차 중국 비난결의문을 내놨다.

386 진보정치 弔鐘 앞당길 것

한국에 대한 홍콩인들의 유대감은 배신감으로 바뀌고 있다. 홍콩 민주화운동의 상징 조슈아 웡은 그제 한 인터뷰에서 “어떻게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이 침묵할 수 있느냐”며 “한국 정부에 정말 실망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386 진보정치의 가치가 무엇인지, 어디로 끌고 가려는 것인지 근본적인 회의가 커지지 않을 수 없다. 일각에서는 중국이 최대 교역국이라는 현실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호주 등 많은 나라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민망한 변명일 뿐이다. 나아가 그런 경제적 셈법이라면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이끈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비난도 상당 부분 근거를 잃게 된다.

몇 주 전 공개된 43건의 기밀문서를 통해 5·18 당시 광주 학생들이 미국에 중재 요청을 한 사실이 밝혀졌다. 미국은 혼란한 정국의 인질이 되지 않기 위해 중재를 거부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이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면 희생이 줄어들 수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것은 386 정치의 조종을 앞당기는 자기모순이다.

진보진영이 모르쇠 하는 사이에 그들이 친일·반민주 적폐로 몰아붙인 이들이 ‘자유 홍콩’을 지지하고 나섰다. 미래통합당 나경원·윤상현 전 의원, 하태경 의원 등이다. 진중권 평론가도 지지대열에 가세했다. 말끝마다 정의와 공정을 부르짖는 386 정치가 시작되자마자 왜 이리 숨을 쉴 수가 없는 것인지.

kecor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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