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 '엑소엘' 팬덤, 200년 전에도 있었다고? [김수현의 THE클래식]

입력 2021-06-20 07:00   수정 2021-06-20 07:09

<svg version="1.1" xmlns="http://www.w3.org/2000/svg" xmlns:xlink="http://www.w3.org/1999/xlink" x="0" y="0" viewBox="0 0 27.4 20" class="svg-quote" xml:space="preserve" style="fill:#666; display:block; width:28px; height:20px; margin-bottom:10px"><path class="st0" d="M0,12.9C0,0.2,12.4,0,12.4,0C6.7,3.2,7.8,6.2,7.5,8.5c2.8,0.4,5,2.9,5,5.9c0,3.6-2.9,5.7-5.9,5.7 C3.2,20,0,17.4,0,12.9z M14.8,12.9C14.8,0.2,27.2,0,27.2,0c-5.7,3.2-4.6,6.2-4.8,8.5c2.8,0.4,5,2.9,5,5.9c0,3.6-2.9,5.7-5.9,5.7 C18,20,14.8,17.4,14.8,12.9z"></path></svg>185cm 훤칠한 키에 조각을 빚은 듯한 얼굴을 지닌 한 남성이 금발을 휘날리며 무대에 올라서자 수천명의 관객이 환호를 보낸다. 그가 한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청중들이 던진 보석과 꽃들이 수놓인다. 무대 중앙에 자리한 남성이 자신의 장갑과 손수건을 객석을 향해 던지자 청중은 이를 쟁취하고자 울부짖으며 싸움을 벌인다. 흥분된 상태의 객석을 바라보던 그가 연주를 시작하자, 장내는 한순간에 조용해진다.
전 세계 음악 시장을 뒤흔들고 있는 방탄소년단(BTS)과 그 팬덤 '아미'의 모습도, K팝 열풍을 이끌고 있는 엑소와 그 팬클럽 '엑소엘'의 모습도 아닙니다. 바로 200년 전, 아이돌의 시초격으로 불리는 헝가리 대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1811~1886)의 공연을 묘사한 글입니다.

클래식 음악, 대중음악을 포괄한 음악사 전체에서 대중들이 처음 열광한 인물이 리스트라는 것에 대해 이견을 제기하는 이는 없습니다. 팬덤이 워낙 강력해서 벌어진 각종 일화는 지금까지도 음악계에서 회자되는 이야깃거리 중 하나입니다. 천재로 태어나 초절정 기교를 완성하고, 자신의 팬을 위해 무대 형식 자체를 뒤바꿔버린 전무후무한 슈퍼스타 리스트의 인생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전 공연 매진에 초상화 굿즈까지…19세기 아이돌 '리스트'
19세기 유럽 투어를 돌던 리스트의 피아노 독주회 현장에서 팬들이 보였던 극성스러운 모습은 현시대의 사생팬을 연상케 할 정도입니다. 전 공연 전석 매진은 물론이고, 리스트가 탄 마차가 공연장 뒤로 나가면 수백대의 마차가 그 뒤를 따랐다고 하죠. 리스트가 배를 타고 타국으로 이동할 때면 팬들은 아예 증기선을 통째로 빌려 배웅을 나갔다곤 합니다.

팬들의 애정은 리스트가 오른 무대에서 더 폭발적으로 표현됐습니다. 리스트가 등장하면 그의 팬들은 자신의 목과 팔에 걸린 보석들을 풀어헤치면서 던지곤 했다죠. 이내 리스트가 연주를 시작하면 청중 곳곳에서 엑스터시 현상을 보이면서 기절하는 상황이 연일 펼쳐졌다고도 합니다. 그 당시 리스트가 누렸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죠.

오늘날 '굿즈'라 불리는 리스트 기념품도 열풍이었습니다. 도자기와 브로치 등 개인의 소장품에 리스트의 초상화가 그려진 형식이었다고 하는데, 조금은 특별한 소지품을 갖고 싶은 이들끼리 벌이는 경쟁도 매우 치열했다고 전해집니다. 팬들은 리스트의 장갑과 손수건은 물론 머리카락, 커피 찌꺼기, 담배꽁초 등에 광적인 집착을 보였다고 합니다.

소동도 발생했다는 기록들이 나옵니다. 리스트가 치던 피아노에서 현이 끊어지면 이를 몸에 차고 다니기 위한 팬들 간의 싸움이 일어났고, 리스트가 먹던 커피 찌꺼기를 모으기 위해 항상 유리병을 지니고 있는 팬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한 부잣집 여성이 리스트가 버린 담배꽁초를 자신의 다이아몬드로 치장된 파우치에 담아서 가져갔다는 것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유럽 전역에 퍼진 전례 없는 현상에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리스토마니아(Lisztomania)'라는 명칭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팬클럽 이름, 팬텀명인 셈입니다. 이 단어는 지금까지도 리스트의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을 칭하거나, 국내외 유명 음악가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피아노의 파가니니, 잘생긴 외모에 초인적인 기교까지 '완벽'
그렇다면 리스트가 엄청난 팬덤을 거느리게 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뚜렷한 이목구비와 185cm라는 키는 여성 팬들의 마음을 훔치기에 적격이었죠. 그러나 그의 인기 비결을 외모로 한정 짓긴만은 어렵다는 게 중론입니다. 그는 연주가면서도 작곡가이자 공연 연출가이기도 했습니다.

리스트는 당시 그의 피아노 연주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리스트는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낸 음악 천재였습니다. 10살이 되었을 무렵 오스트리아 빈에서 연주회를 열었는데, 당시 이를 본 베토벤이 "재주가 큰 아이"라고 칭찬하며 이마에 키스해준 일화는 유명하죠.

이후 리스트는 피아노로 구현할 수 있는 초인적인 테크닉을 완벽하게 소화해가며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기도 했습니다. 현시대에 우리가 듣고 있는 피아노의 고난도 테크닉은 대부분 리스트에 의해 창안됐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빠른 템포로 옥타브를 연속해서 치거나, 손가락이 닿을 수 없는 음정으로 도약하는 진행 등 피아노를 통해 극단의 기교와 화려함을 실현시켰다고 평가받는 인물이 바로 리스트입니다.

'피아노의 파가니니'로 불려온 리스트의 실력은 그가 작곡한 작품을 살펴보면 더 와닿습니다.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곡으로, 5초 동안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타건 수만 160번에 달합니다. 빠른 곡의 대명사로 알려진 '왕벌의 비행'의 타건수가 76번입니다. 이와 비교하면 리스트의 곡은 단시간에 쏟아내는 음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다른 손가락에 비해 약하고 인대가 연결돼 있어 단단한 소리를 내기 어려운 넷째, 다섯번째 손가락을 빠르게 번갈아 가면서 사용해야 한다는 어려움도 있죠.

이 때문에 초절기교 연습곡은 지금까지도 피아니스트의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실제로 작곡가 슈만은 "이 세상에서 이 곡을 연주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는 10여명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라고 하죠. 물론 리스트는 자신의 곡을 매우 쉽게 연주했다고 합니다. 한계가 없던 피아니스트였기에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작품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대연습곡'으로 편곡하고, '헝가리안 랩소디' 등 현란한 테크닉이 필요한 곡을 직접 작곡해 연주하곤 했다고 합니다.
팬서비스까지 완벽…공연계 획기적 변화 일으키기도
모든 걸 갖춘 음악가 리스트. 그는 공연 연출가이기도 했는데, 팬서비스를 위해 구축한 형식은 오늘날 공연계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먼저 자신을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는 팬들을 위해 무대 형식 자체를 바꾸는 혁신적인 시도를 했습니다. 그는 관객에게 자신의 손놀림, 연주 중에 나오는 전신 움직임, 감정을 표현하는 표정 등을 더 면밀히 전달하기 위해 무대에서 피아노를 90도 회전해 연주한 최초의 인물입니다.

리스트 이전까지 피아노 연주자들은 청중을 등지고 앉았습니다. 청중들은 연주자들의 뒷모습과 피아노 건반을 보게 배치됐습니다. 하지만 꽃미남 리스트는 얼굴을 보여주기 위해 피아노를 옆으로 돌렸습니다. 팬들을 위해 무대에 변화를 준 겁니다. 아마 이러한 시도가 없었다면 약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가 연주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리스트는 자신의 뛰어난 실력과 탄탄한 레퍼토리를 기반으로 음악사 최초로 독주회 형식을 탄생시키기도 했습니다. 이전까진 한 악기로만 구성된 연주회를 여는 경우는 전무했다고 합니다. 리스트가 처음으로 독주회를 선보이면서 지금의 단독 '리사이틀' 형식이 갖춰졌죠. 공연계 전반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킨 대표적인 음악가로 리스트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리스트. 그의 엄청난 인기는 어쩌면 잠시뿐일지 모를 작은 관심에 실력으로 보답하고, 더 좋은 연주를 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해 온 결과일지 모릅니다. 그의 뒤에서 한결같이 자리해온 팬덤이 어린 천재를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이끌어온 원동력이었단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죠. 더 나은 연주자로, 더 좋은 팬덤으로 끈끈한 연결고리를 만들어온 이들의 상호작용이 음악계에 변화를 일으켰듯 현시대의 많은 아티스트와 팬덤도 그 길을 이어가길 응원하겠습니다.

김수현 한경닷컴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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