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형의 현장노트]참신한 무대와 정교한 음악의 조화…자네티는 빛났지만

입력 2022-03-05 00:53   수정 2022-03-21 16:21



무대 전체에 드리워진 검은 막을 배경으로 피가로(손혜수 분)가 의자 하나를 달랑 들고 등장합니다. 수잔나(박하나 분)가 뒤따라 나와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1막 첫 번째 넘버 '다섯 자 열 자'를 함께 부릅니다. 이때만 해도 이른바 '콘서트 오페라'를 이런 형식으로 진행하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피가로가 일종의 카바티나(반복 없는 짧은 노래)인 '나리께서 만약 춤을 추신다면'을 부를 즈음 검은 막이 올라가는데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이전에 다른 '피가로의 결혼' 무대에선 보지 못했던 독특한 미장센이 펼쳐졌습니다. 다양한 크기의 빨간 사각 틀과 의자들이 공중에 걸려있고 그 아래 책상과 의자들이 배치돼 있습니다. 무대 뒤 배경에는 거대한 시계판 영상이 뜹니다. 극 중 현재 시간이 이른 아침임을 알려줍니다. 피가로가 카바티나를 부르는 동안 무용수 한 명이 등장해 노래에 맞춰 춤을 춥니다. 뮤지컬 무대에선 종종 보던 연출인데 오페라 공연에선 처음 봅니다.

지난 3일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열린 '경기필하모닉 콘서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공연 현장입니다. 인상적인 첫 장면 이후 전개된 무대는 공연 제목에 붙은 '콘서트 오페라'와는 딴판입니다. 무대와 의상, 연기, 조명 등 모든 극적 요소가 완벽하게 갖춰진, 그것도 보기 드물게 완성도가 높은 '극 오페라'가 펼쳐쳤습니다.

단출한 미니멀리즘 무대 연출이 일품입니다. 오페라 연출가 장서문의 솜씨입니다. 여기에 다양한 연극적 기법을 가미해 오페라 부파의 최고봉인 '피가로의 결혼'의 희극적 재미를 풍부하게 살립니다. 무대를 오르내리는 사각 틀을 활용한 공간 분할과 동선 구성, 이를 통해 디테일을 하나하나 살려내는 세심한 연출이 돋보입니다. 1막에서 무대 뒷 편 사각 틀 뒤 바질리오가 횡으로 움직이며 수잔나와 케루비노의 얘기를 엿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캐릭터의 야비한 성격을 알려주는 듯 합니다. 2막에선 백작부인 로지나 방에서 수잔나와 케루비노, 로지나, 알마비바 백작, 피가로, 바질리오가 얽히며 한바탕 소동이 벌어집니다. 사각 틀은 방문과 창문, 옷장문 역할을 하며 공간을 효율적으로 나눕니다. 등장인물들이 가상의 사각 틀 방문을 빈번하게 드나들 때 문이 열고닫히는 효과음을 하프시코드가 내는 게 절묘합니다. 얼핏 놓칠 수 있는 디테일한 요소입니다.

3막 피가로가 마르첼리나와 바르톨로의 아들이라는 게 밝혀지는 장면에서 부르는 6중창에서 같은 편인 백작과 판사를 한 사각틀에 넣는 것도 재밌습니다. 제가 가장 감탄한 대목은 마지막 4막입니다. 피가로와 수잔나, 백작과 백작부인, 여기에 케루비나까지 얽혀 오해와 반전이 중첩되는 복잡한 장면으로, 동선 처리와 공간 구성이 잘 되지 않으면 무대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뭐가 뭔지 모를 때가 많은데요. 이를 사각틀 배치를 통해 깔끔하고 효율적으로 보여줍니다. 연극의 이른바 '무대약속'을 활용해 관객들이 상상력으로 빈 공간을 넉넉하게 채울 수 있도록 합니다.

주역들과 코러스 등 출연진의 퍼포먼스도 뛰어났습니다. 연출가가 요구했을 법한 깨알같은 희극적 재미와 극 전반에 흐르는 성적인 자극과 긴장감을 잘 살려냈습니다 특히 성적인 호기심과 에너지로 넘치는 천방지축 10대 케루비노 역을 맡은 메조소프라노 김정미가 돋보입니다. 연출가는 원작인 보마르세의 3부작(세비야의 이발사, 피가로의 결혼, 죄지은 어머니)을 꿰뚫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극중 케루비노와 백작부인 사이 묘한 기류가 감지되는데요. 달려드는 케루비노를 대하는 백작부인의 눈빛과 표정, 태도가 특히 그렇습니다. '피가로의 결혼' 후속작인 '죄지은 어머니'로 이어지는 두 사람의 관계까지 염두에 둔 연출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무대와 연출, 연기가 아무리 빼어나도 오페라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음악이 받쳐주지 않으면 소용 없습니다. 마시모 자네티 경기필하모닉 예술감독은 '오페라 스페셜리스트'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습니다. '피가로의 결혼'은 자네티가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이자 국내에서 꼭 지휘하고 싶은 작품어었다는데요. 마치 '물 만난 물고기' 같았습니다. 작품에 통달한 듯 했습니다. 서곡부터 특유의 유연한 제스처로 활기차게 들려주더니 세 시간 가까이 이어지는 본 공연 내내 음표 하나, 마디 하나 놓치지 않고 자신감 있게 오케스트라를 이끌었습니다. 무대 장악력도 뛰어났습니다. 명확한 지시로 배우들과 소통하며 무대에 활력을 불어 넣었습니다. 하프시코드를 맡은 알렉산드로 프라티토의 연주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은 바로크 오페라의 영향이 남아 있어 하프시코드 반주 비중이 높은데요. 프라티토는 무대 위 배우들과 찰떡궁합의 호흡을 보여줬습니다. 극의 흐름을 이끄는 레치타티보의 율동감을 탁월하게 살려냈습니다. 1막의 효과음까지 한치의 오차도 없었습니다.



다만 공연장 음향 환경이 연주와 가창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습니다. 소리가 실내에 자연스럽게 울리지 못하고 먹히는 감이 있었습니다. 1500석 대극장의 자연음향 설계가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공연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입니다. '피가로의 결혼'에 흐르는 주옥같은 아리아와 중창의 음악적 감동이 기대 만큼 와닿지 못했다면 성악가들의 가창보다는 공연장 탓이 큽니다. 무대 양옆에 붙은 자막 화면도 관람의 집중도를 저해하는 요인입니다. 글자 크기가 작은 자막을 좇다 보면 무대의 풍부한 연극적 재미와 극 내용과 착 달라붙은 음악의 정교함을 놓치지 쉽습니다. 이번 공연을 보다 좋은 음향 환경을 가진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이나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옛 LG아트센터 역삼동 공연장에 올리면 재미와 감동이 배가됐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콘서트 오페라'라는 타이틀입니다. 제가 이번 공연 현장을 찾은 것은 자네티가 2019년 10월 서울시오페라단과 함께한 '돈 조반니' 연주를 인상 깊게 들어 '피가로의 결혼'은 어떨지 궁금해서였습니다. 이렇게 참신하고 독특한 무대 연출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횡재'한 기분이지만 콘서트 오페라라는 이유로 공연을 찾지 않은 분들에겐 안타까운 일입니다. 콘서트 오페라라고 하면 베를린 필하모닉이 이번 시즌에 선보인 차이코프스키의 '이올레타'나 '마제타'처럼 오케스트라가 무대에 서고 성악가들이 그 앞에서 연기를 곁들여 노래하는 콘서트 형식의 공연을 떠올립니다. 오페라 애호가들 중에는 불완전한 형식의 콘서트 오페라를 선호하지 않은 분들이 많습니다.
예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2020년 10월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국립오페라단이 베토벤의 '피델리오'를 공연했습니다. 콘서트 오페라라는 타이틀을 붙였지만 제가 본 공연은 뛰어난 드로잉 아트와 결합된 '극 오페라'였습니다. 이번 '피가로의 결혼'은 더 완벽한, 모든 극 요소를 갖춘 오페라 공연입니다. 관객들이 공연 콘셉트에 대한 혼란을 겪지 않도록 클래식 공연계는 '콘서트 오페라'의 개념을 보다 명확하게 규정하고, 신중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사진=경기필하모닉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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