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ARM 칩을 안 쓰겠다고요? 틀렸고, 틀렸습니다"

입력 2024-02-02 18:30   수정 2024-02-03 01:17


영국 케임브리지에 본사를 둔 반도체 설계회사 ARM홀딩스가 칩 하나당 받는 로열티는 1.5달러가량이다. 이것도 판매가가 1000달러 넘는 하이엔드 스마트폰에 들어갈 때 얘기다. 중저가폰에 들어가는 저사양 칩일 경우 로열티가 몇 센트에 불과하다. 2023 회계연도 ARM 매출이 27억달러(약 3조6000억원)밖에 되지 않는 이유다. 영업이익도 7억달러(약 9000억원) 정도다.

반면 시가총액은 723억달러(약 96조원)에 이른다. 전 세계 상장사 중 221위다. ARM보다 매출이 10배는 많은 SK하이닉스 시총과 맞먹는다. 시장에서 바라보는 성장성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ARM, 모든 것의 마이크로칩>은 그 ARM의 성공스토리를 다룬 책이다. ARM의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반도체업계의 역사까지 간략히 담았다. 애플과 인텔, TSMC, 삼성전자, 엔비디아 등이 조연으로 출연한다. 책을 쓴 제임스 애슈턴은 영국 언론인이다. 런던 이브닝 스탠더드와 인디펜던트에서 편집장을 지냈다.

ARM은 1990년 에이콘 컴퓨터와 애플, VLSI테크놀로지의 합작 회사로 설립됐다. 에이콘은 직원 12명을 보냈고, VLSI는 도구를, 애플은 300만달러를 제공했다. ARM은 ‘에이콘 리스크(RISC) 머신’을 뜻했지만, 애플의 요청에 따라 ‘어드밴스드 리스크 머신’의 약자로 바뀌었다.

중앙처리장치(CPU)와 같은 비메모리 반도체는 ‘더 강력하고, 더 빠른’ 칩을 목표로 숨가쁜 경쟁을 벌인다. 그래서 인텔의 전설적인 최고경영자(CEO) 앤디 그로브는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고 했다.

ARM이 만드는 칩은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인텔 등이 제작하는 칩에 비해 허술해 보였지만 싸고 전력 소모가 적었다. 저자는 역설적으로 영국이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미국 실리콘밸리와 달리 영국의 벤처 기반은 빈약했다. 돈도 없고, 사람도 없었다.

기존 업체와의 정면 승부는 어림도 없었기 때문에 에이콘 컴퓨터 엔지니어들은 ARM 설립 전 IBM 연구원이 개발한 RISC에 주목했다. RISC는 축소 명령어 집합 컴퓨터를 줄인 말인데, 말 그대로 CPU 명령어 수를 줄이고 긴 명령어는 간단한 명령으로 잘게 쪼갰다. 컴퓨터 칩이 대부분 동작 시간 동안 전체 명령어의 20%만 사용한다는 점에 착안했다. 1985년 선보인 ‘ARM1’은 실제로 전류계가 0을 가리킬 정도로 전력을 거의 소모하지 않았다.

ARM은 1990년대 노키아 휴대폰에 칩을 넣으며 주목받았지만, 지금과 같은 입지를 구축한 것은 애플 아이폰에 ARM 칩이 들어간 것이 결정적이었다. 애플은 ARM 설계도를 조금 수정한 후 삼성전자에 제조를 맡겼다. ‘아톰’ 칩을 내놓고 모바일 시장에 진출한 인텔로서는 뼈아픈 패배였다. 인텔은 아톰이 PC용 X86 칩보다 전력을 90% 덜 쓴다고 자랑했지만, 그것도 ARM 칩보다는 전력 소모가 컸다.

애플 아이패드에도 ARM 칩이 들어갔다. 이때 격론이 일었다. 잡스는 인텔 아톰을 쓰려고 했다. 애플에서 하드웨어 엔지니어링을 담당하던 토니 퍼델 부사장이 반대했다. 그는 잡스 면전에서 “틀렸고, 틀렸고, 틀렸습니다!”라고 했다. 책은 “애플이 아톰을 배제한 다른 이유는 자신들의 방법으로 칩을 만들고 테스트하기를 원했던 애플에 인텔이 경직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업계에서 ARM은 ‘반도체의 스위스’로 불린다. ARM은 특정 업체와 독점 계약을 맺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일정 자격 조건만 되면 누구나 기술 라이선스를 맺고 ARM 설계도를 가져갈 수 있다. ARM 성공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엔비디아가 ARM 인수를 시도했을 때 업계가 발칵 뒤집힌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저자는 “ARM은 태생적으로 제약을 장점으로 전환하는 데 능숙했다”며 “돈이 넘쳐났다면 ARM의 설계 지침서가 그렇게 훌륭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또 “비즈니스에는 직선이 없다”고 강조했다. ARM은 설립 때부터 애플과 접점을 가졌지만 아이폰을 통해 가파른 성장을 이룬 것은 그로부터 15~20년이 지나서였다. 저전력 칩이 필요한 시대가 열릴 것이란 뚝심을 지킨 덕분이다.

책에 단점이 없지 않다. 내용이 다소 피상적이다. ARM에 집중하지 않고 여러 업체 이야기를 곁들인 것이 산만하게 느껴진다.

월터 아이작슨의 <스티브 잡스>나 크리스 밀러의 <칩 워> 같은 책만큼 밀도가 높지 않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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