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쓰고 보자"…공시 보니 '달랑 두 줄' 무슨 일이?

입력 2026-03-31 14:57   수정 2026-03-31 17:55


설립 50여년차인 유가증권시장 상장기업 A사는 최근 첫 기업가치제고 공시를 발표했다. 지난해 배당액을 늘리면서 조세특례제한법상 배당소득 분리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고배당 기업에 해당돼서다. 고배당 기업이 기업가치제고 공시를 올리면 분리과세에 따른 절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오는 7월부터 시행되는 ‘저(低)PBR(주가순자산비율) 기업명단 공개’에서 제외될 수도 있다. A사의 PBR은 0.24배에 그친다.

하지만 A사가 기입한 가치제고 목표는 단 두 줄. 그마저도 ‘수익성 중심의 경영체계 강화’, ‘지속적인 노력을 통한 주주가치제고 확대’와 같은 원론적인 문구였다. 향후 기업가치를 띄울 계획도 ‘원가 경쟁력 강화 및 생산 효율성 개선’ 등 구체성이 떨어지는 내용뿐이었다. 밸류업 공시가 올라온 이후 A사의 주가는 오히려 3% 이상 하락했다.
○공시하면 절세·저PBR 낙인 면제
정부의 밸류업 정책 기조에 발맞춰 기업가치제고계획을 발표하는 기업들이 큰폭으로 늘어난 가운데, 저PBR 꼬리표를 피하거나 절세 혜택을 받을 목적으로 ‘맹탕 공시’를 하는 기업들도 속출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지속적인 연구개발(R&D)’, ‘신성장 사업 개발’ 등 알맹이가 없고 모호한 내용으로 공시를 채워 주가가 하락하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주주와의 소통과 자발적 주가 부양이란 정책의 목표에 반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31일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들어 올라온 기업가치제고계획 공시는 474건에 달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35건)은 물론, 작년 한 해 동안 올라온 기업가치제고계획 공시(141건)를 크게 뛰어넘었다. 2년 전(98건)과 비교하면 5배 가까이로 급증했다.

기업가치제고 공시가 급증한 건 지난달부터 시행된 배당소득 분리과세 정책 효과가 크다. 정부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차원에서 △직전 사업연도 배당성향이 40% 이상이거나 △배당성향이 25% 이상인 동시에 직전 연도 대비 배당금을 10% 이상 늘린 기업에 대해 정기주주총회 다음날까지 기업가치제고계획을 공시할 경우 분리과세 특례를 적용하기로 했다. 분리과세 시 배당소득 구간별로 세율(14~30%)을 다르게 적용하기 때문에 기존 금융소득종합과세 최고 세율(49.5%)과 비교하면 절세 혜택이 크다. 기업 경영권을 가진 최대주주에도 유리하다.

오는 7월 시행 예정인 ‘저PBR 기업 명단 공개’를 피하려는 목적도 크다. 금융당국은 업종별 PBR 하위 20% 종목을 공개하는 ‘네이밍 앤 쉐이밍’(공개해 망신주기) 방식을 도입키로 했는데, 기업가치제고계획을 발표하면 일정 기간 면제해주기로 했다. 사전에 자발적으로 밸류업 계획을 세우면 정상 참작해주겠다는 것이다.
○모호한 내용에 주가 외려 하락
이같은 이유로 기업 400여 곳이 일제히 밸류업 공시를 올렸지만, 최소한의 형식만 갖춘 채 정작 기업가치제고 로드맵은 구체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원양어업 업체 B사는 기업가치제고 목표가 ‘핵심사업 경쟁력 강화’로 단 한 줄이었다. 지난 20일 공시를 발표한 후 이날까지 주가는 4% 떨어졌다. B사의 PBR은 0.2배에 그친다. 플라스틱 가공업체 C사도 ‘품질경쟁력 강화’, ‘대외환경 변화에 대응’ 등 숫자 없이 모호한 내용을 공시한 후 주가가 5% 가까이 떨어졌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기업들이 배당을 늘린 건 고무적이지만, 설비투자, 인수합병(M&A), 자사주 매입 등 장기적인 주가 부양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면 밸류업 정책은 ‘앙꼬 없는 찐빵’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한국거래소 관계자는 “지난달 말 조세특례제한법 시행령 개정 후 상장기업의 준비시간이 부족한 점을 감안해 시행 첫 해에 한해 약식공시를 허용했다”며 “내년부터 현황진단, 목표설정, 계획수립, 이행현황, 소통 등 기업가치제고계획의 모든 내용을 기재한 완결성 있는 공시를 제출하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저PBR 기업 명단 공개 면제에 대해서는 “PBR 개선을 위한 현황진단, 목표설정, 실행계획 등이 포함된 공시를 제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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