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안 했을 뿐인데 사기?"…침묵이 '거짓말' 되는 순간 [조대환의 영미계약법 스케치]

입력 2026-05-02 00:00  

한경 로앤비즈의 'Law Street' 칼럼은 기업과 개인에게 실용적인 법률 지식을 제공합니다. 전문 변호사들이 조세, 상속, 노동, 공정거래, M&A, 금융 등 다양한 분야의 법률 이슈를 다루며, 주요 판결 분석도 제공합니다.

보이지 않는 위험에서 시작되는 거래
부동산 거래에서 사람들은 대개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위치와 구조, 가격과 수익성 등과 같은 요소들이 협상의 중심이 된다.

그런데, 실제 거래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부분인 경우도 많다. 건물 내부의 결함이나 구조적 문제처럼 외관상 확인하기 어려운 요소들은 매수인이 사전에 파악하기 쉽지 않다.

이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 Obde v. Schlemeyer사건이다. 매도인 슐레마이어(Schlemeyer)는 자신의 아파트 건물을 매수인 오브데(Obde)에게 매도했다. 거래가 성사되기 전, 슐레마이어는 건물 내부에 심각하게 흰개미떼가 득실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매수인은 아파트를 매수한 후에야 건물 내부에 심각한 흰개미(termites) 피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문제는 매도인이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전문가의 점검까지 받아둔 상태였다는데도 매수인에게 이를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훼손된 부분을 보수와 도색으로 가려 외관상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 사건에서 매도인은 "나는 허위 진술을 한 적이 없다. 단지 매수인으로부터 이에 관한 질문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전통적 계약법의 논리로 계약은 원칙적으로 각자의 책임 하에 체결되는 것이며, 매도인에게 일반적인 정보 제공 의무는 없다.

반면 매수인은 이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결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숨기고 오히려 외관을 조작해 잘못된 인식을 유도한 점을 문제 삼았다. 법원은 이 사건의 핵심이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매수인이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조치를 취했다는 점에서 정보의 비공개가 아니라 은폐로 보고 매수인의 손을 들어주었다(Obde v. Schlemeyer, 353 P.2d 672 (Wash. 1960)).
“말하지 않음”과 “숨김” 사이의 경계
법원은 흰개미 피해는 건물의 구조적 안전과 직결되는 중대한 사항이며, 매도인은 결함의 존재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그 결함은 외관상 발견하기 어려운 잠재적 하자였으며, 매수인은 통상적인 조사로 이를 확인하기 어려운 지위에 있었다고 봤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결함을 가리는 행위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사실상 “결함이 없다”는 잘못된 인식을 유도하는 적극적 행위로 평가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법원은 매도인의 행위를 적극적 은폐(active concealment)로 규정하고, 이는 허위 진술이 없는 경우에도 사기(fraud)를 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판결은 침묵이 언제나 중립적이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강한 형태의 기망이 될 수 있음을 명확히 했다.

전통적인 계약법의 출발점은 “Caveat Emptor(let the buyer beware; 매수인 자기책임의 원칙)”으로, 거래시 해당 물건의 하자나 상태를 확인할 책임은 매수인이 일차적으로 부담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에 따르면 매수인은 스스로 위험을 조사하고 판단해야 하며, 매도인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제공할 의무를 부담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매도인의 침묵은 원칙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아닐 수 있으나 법원은 이 사건에서 이러한 접근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문제의 핵심은 단순한 비공개가 아니라, 매수인의 판단을 왜곡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은폐에 있었다. 매도인은 결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드러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외관을 조작해 결함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단순히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잘못된 판단에 이르도록 유도한 행위로 평가한 것이다.
계약법의 변화: 부실표시의 확장
이 판례의 핵심적 의의는 부실표시(misrepresentation)의 개념을 확장했다는 점에 있다. 전통적으로 부실표시는 사실과 다른 진술, 즉 허위의 적극적 표현을 중심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실제 거래에서는 오히려 "말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왜곡을 낳는 경우가 많다. 부실표시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요소를 갖는다. 첫째,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진술이 존재해야 하고, 둘째, 그 진술이 중요한 사항(material fact)에 관한 것이어야 하며, 셋째, 상대방이 그 진술에 정당하게 의존해 계약을 체결했어야 한다.

여기서 "진술(assertion)"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지인데, 일정한 상황에서는 명시적 발언이 없어도 침묵 자체가 하나의 묵시적 진술로 기능할 수 있다.

특히, (i) 상대방이 중요한 사실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는 경우, (ii) 그 사실이 계약의 기본적 전제를 이루는 경우, (iii) 일방 당사자가 그 사실에 대해 특별한 지식이나 정보 접근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은 단순한 정보 비공유가 아니라, 사실상 "그러한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아가, 이 사건처럼 결함을 인위적으로 가리는 행위는 단순한 생략(omission)이 아니라 명백한 은폐(concealment)로서, 부실표시의 전형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이 판례는 "Caveat Emptor"라는 원칙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적용 범위를 제한한 사례다. 매수인의 주의의무가 여전히 존재하더라도 그것이 매도인의 기망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디지털 시대, 더 무거워진 침묵의 의미

이 판례는 계약이 단순한 위험 전가의 장치가 아니라, 최소한의 신의성과 공정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오늘날 거래는 점점 더 비대면 디지털 환경으로 이동하고 있고, 정보의 비대칭성은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소비자는 상품을 직접 확인하기보다, 판매자가 제공하는 정보와 이미지에 의존하게 된다. 보정된 이미지, 선택적으로 제공되는 정보, 불리한 사실을 눈에 띄지 않게 배치하는 방식 등은 오늘날 거래에서 흰개미떼의 피해를 숨기는 것과 같은 은폐로 볼 수 있다.

겉으로는 아무런 거짓말도 하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오해를 유도하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계약은 단순한 문서가 아니라 정보의 공정한 교환을 전제로 하는 신뢰의 구조다.

거래의 현장에서 침묵은 때로 가장 안전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일정한 순간 그 침묵은 적극적인 왜곡으로 평가되어 거짓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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