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산소호흡기 낀 채 계좌번호 부른 유언 유효"

입력 2026-05-04 18:01   수정 2026-05-05 00:10

산소호흡기를 낀 채 병상에서 특정 가족에게 전 재산을 물려주겠다고 한 망자의 유언이 법적 효력을 인정받은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말로 하는 구수증서 유언의 인정 범위를 둘러싼 법적 분쟁에서 판단 기준이 될 전망이다.

대법원 3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A씨가 우리은행을 상대로 낸 예금 반환 청구 소송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4일 밝혔다. 2021년 4월 A씨의 이부형제 B씨는 사망 사흘 전 병실에서 계좌번호를 알려주며 “A씨에게 예금채권과 전세보증금 반환채권 등 전 재산을 넘긴다”고 말했다. 이 장면은 증인이 영상으로 촬영했다. 이후 A씨는 B씨 명의 예금 약 9600만원을 인출하려고 했지만 은행이 이를 거부하자 2022년 8월 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서는 이 유언이 ‘포괄적 유증’에 해당하는지가 쟁점이었다. 포괄적 유증은 재산이 곧바로 수증자에게 이전되는 방식으로, 상속인을 거치는 특정적 유증과 구별된다. 법원은 “망인에게 유언에 언급된 것 외에 다른 재산이 없다고 보기 어렵다”며 포괄적 유증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2심에선 B씨 유언이 구수증서 유언의 요건을 갖췄는지가 쟁점이 됐다. 재판부는 이 녹음이 날짜를 특정하지 않고 증인의 확인·낭독 절차도 없어 민법상 ‘녹음 유언’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봤다. 그러면서 녹음 유언 등이 어려울 때 예외적으로 인정하는 구수증서 유언에 해당하는지를 살폈다.

민법은 자필, 녹음, 공정증서 등 일정한 방식의 유언만을 원칙적으로 인정한다. 다만 질병 등 긴급한 상황에 한해 구수증서 유언을 허용한다. 이 경우 유언 내용을 들은 증인이 이를 필기·낭독하고, 유언자가 그 정확성을 승인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재판부는 “유언장이 작성될 당시 망인이 재산 상태, 유증의 의미, 상대방 등을 충분히 인지하고 말할 수 있었다”며 굳이 구수증서 유언을 택할 필요가 없었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판단을 달리했다. 재판부는 “유언 당시 망인은 호흡곤란 증상으로 정상적인 발음에 장애가 있었고 자유롭게 계속 말하는 것 또한 곤란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제3자 도움 없이 유언 취지를 자필증서로 작성하거나 육성을 녹음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다”고 판단했다. 또 “유언자의 진의를 명확하게 하고, 법적 분쟁과 혼란을 예방하기 위해 구주증서 유언의 요식성을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김유진 기자 magiclam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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