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경테 2개 3000원.' 검은색 매직으로 휘갈겨 쓴 안내판 위로 안경이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길가 가판대 사이로 흰머리의 중장년층과 데이트를 나온 2030이 뒤섞여 안경을 뒤적였다.
여자친구와 함께 온 정현욱 씨(20)는 "오늘 예산은 3만원"이라며 "저희 나이대는 쓸 수 있는 금액에 제한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요즘은 밥도, 물가도 비싸다 보니까 적은 돈으로 오래 구경하고 놀 수 있는 동묘로 왔다. 성수, 한남은 마음 놓고 가기 어렵다"고 했다.

지난 19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숭인동 동묘시장에서 본 풍경이다. 평일 오후에도 동묘 시장 골목 곳곳은 중장년층과 2030 방문객으로 가득했다. 최근 동묘시장이 고물가 시대 2030의 '저비용 놀이터'로 떠오르고 있다. 저렴한 음식과, 빈티지 안경, LP판, 의류 등을 구경하며 적은 돈으로 오래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비싼 카페나 팝업스토어 대신 '구경하는 재미' 자체를 소비하는 이른바 불황형 소비가 확산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030 방문객이 몰린 곳은 1000원 옛날 토스트 가게와 2000원대 빈티지 안경테 가판대, 헌책방 등이었다. 가판대에서 여자친구와 안경을 둘러보던 전모씨(28)는 "일단 싸니까 부담 없이 구경하게 된다"며 "게다가 이렇게 제품을 막 놓은 곳에서 아이템을 하나하나 찾는 재미는 동묘에서만 느낄 수 있다. 심지어 모든 과정이 공짜"라고 말했다.
상인들은 최근 2030 유입이 늘었다고 체감했다. 빈티지 안경 가판대를 운영하는 70대 A씨는 "30년 동안 가판했는데 석달 전부터 안경 구경하러 오는 어린 친구들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LP판 가게 점주인 안재성 씨(75)는 "우리 가게 오는 나이든 사람은 5~10%밖에 안 된다"며 "원래 LP판은 중장년, 노년층을 대상으로 팔아왔는데 젊은 친구들이 대다수"라고 했다. 가게 한쪽에는 장당 5000원~1만원 하는 LP판들이 정리돼 있었다.

2030이 적은 돈으로 오래 놀 수 있는 동묘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최근 계속되는 고물가 흐름과 맞닿아 있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4월 소비자물가지수는 119.37(2020년=100)로 1년 전보다 2.6% 상승했다. 2024년 7월(2.6%) 이후 1년 9개월 만에 최대 폭으로 오른 수치다.
도보 10분 거리인 창신동 문구·완구 거리의 인기 역시 동묘 유입과 맞물려 있다. 말랑이 열풍으로 창신동 문구·완구 거리가 젊은 층 사이에서 주목받으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동묘시장과 문구거리를 함께 묶은 '저예산 데이트 코스' 게시물이 확산하는 중이다. 두 공간 모두 적은 비용으로 오랜 시간 머물며 구경할 수 있다는 점이 공통으로 꼽힌다.

이날 동묘시장을 찾은 A씨(27·여성)도 SNS에서 본 '동묘 하루 코스' 게시글을 따라 방문했다. A씨는 "말랑이 때문에 왔다"며 "동묘부터 창신동까지 이어지는 코스가 하루 종일 구경하면서 놀기 좋아 보여 동묘앞역에서 내렸다"고 말했다.
실제 SNS에서도 동묘 관련 언급은 빠르게 늘고 있다. 소셜 데이터 플랫폼 썸트렌드에 따르면 지난 4월 20일부터 이달 19일까지 '동묘'에 대한 언급량은 전년 같은 기간 대비 67.09% 늘었다. 같은 기간 긍정적 언급량은 81%로, 주로 '좋다', '레트로', '사람 많다', '맛있다'라는 키워드가 집계됐다. 인스타그램 '동묘' 해시태그 게시물도 67만건을 넘었다.

전문가는 2030 사이에서 소비 자체를 줄이기보다 소비 방식을 바꾸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홍주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교수는 "불황형 소비는 단순히 돈을 안 쓰는 개념이 아니다"라며 "비싼 소비 대신 저렴한 대체재로 중고, 리퍼 제품을 구매하거나 목적형 쇼핑 대신 가성비·탐색형, 고비용 여가 대신 저비용·체험형 형태로 바뀌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소비를 멈추기보다 소비 방식을 바뀌는 것이 불황형 소비 특징이다.
이 교수는 "동묘는 서울 시내에서 근거리로, 저비용·공간·경험 소비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라며 "경제가 불안하더라도 소비는 이뤄질 수밖에 없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 소비자들은 가성비·가심비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곳을 꾸준히 탐색한다. SNS 인증부터 구경까지 현장에 간 것 자체가 2030은 경험을 소비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수빈 한경닷컴 기자 waterbe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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