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만에 무대 선 조성하, '반야 아재'가 되다 [클로즈업]

입력 2026-05-26 05:46   수정 2026-05-26 05:47



믿고 보는 배우 조성하가 무대로 돌아왔다. 2014년 연극 '프리실라' 이후 12년 만이다.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사극, 액션, 코미디, 범죄 스릴러까지 종횡무진해온 조성하는 지난 22일 상연을 시작한 국립극단의 '반야 아재'(번안·연출 조광화)에서 주인공 박이보를 맡아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를 채우고 있다.

'반야 아재'는 러시아 문학 황금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안톤 체호프의 걸작 '바냐 아저씨'를 한국적으로 번안한 작품이다. 19세기 러시아의 황량한 시골은 일제강점기 충북 영동군 황간면의 정미소로 바뀌었다. 일본군의 수탈이 배경으로 깔리고, 김소월 같은 실존 인물이 언급되는가 하면, 주인공 이보가 한때 머물렀던 반야사 역시 황간에 실재하는 사찰이다. 서병후(남명렬 분)가 몸담았던 보성전문학교까지, 번안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촘촘하게 한국의 시간 속으로 뿌리를 내린 작품이다.



박이보는 그 속에서 가장 많이 빼앗기고 가장 늦게 무너지는 인물이다. 한때 똑똑한 지식인이었지만 반야사에 들어가 외부와 단절된 채 방황했고, 이후 조카 서은희(심은경 분)와 함께 수십년간 시골 정미소를 지키며 매형 서병후의 입신양명을 뒷바라지해온 사람. 그렇게 흘러간 세월 앞에서, 은퇴한 교수 서병후가 정미소를 처분하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그의 내면은 폭발한다.

조성하는 이 폭발을 단계별로 쌓아 올린다. 자기 연민에 빠진 교수 매형만 챙기는 어머니(손숙 분) 앞에서는 나이 쉰을 넘어서까지 장가 한번 못 가고 방황하는 지질한 아들이었다가, 오영란(임강희 분)에게 고백하는 장면에서는 귀여운 순정남이 되고, 서병후와 맞붙는 순간엔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광기가 터진다. 하나의 배우가 한 인물 안에서 이렇게 다른 얼굴을 꺼내 든다.

그러면서도 조성하는 이보를 단순히 비극적인 인물로 만들지 않는다. 2014년 연극 '프리실라' 이후 오랜만에 무대로 돌아온 조성하는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쌓아온 다채로운 연기 내공을 무대 위에서 완벽하게 터뜨린다. 조성하의 이보는 울분 속에도 우스움이 배어 있고, 절망 속에도 따뜻함이 남아 있다. 극이 끝나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채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인물들 중에서, 이보의 '살아남음'이 가장 애처롭게 남는 이유다.

조성하 자신도 이보에게 각별한 공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낡고, 고루하고, 소위 꼰대라고 부르는 시선들이 달라붙기도 하는데 사실 어찌 보면 그들은 우리 가족을 지탱해 온 힘이기도 하고 우리 사회를 받쳐 온 동력이기도 하다"고 그는 말했다. 대한민국 대표 '아재'로서의 자기 고백처럼 들린다.



작품의 무게는 앙상블이 함께 받친다. 심은경이 서은희 역으로 맞선다. "운명처럼 다가왔다"는 그의 말처럼, 삶의 겸허한 진실을 끝까지 붙들고 있는 은희는 심은경이 가진 본연의 결과 닮아 있다. 손숙, 남명렬, 기주봉, 정경순 등 한국 연극의 이름들이 두텁게 극을 받치고, 임강희와 김승대의 밀도 있는 연기가 드라마의 균형을 잡는다.

연출 조광화는 이 작품에 억지스럽지 않은 유머를 끼워 넣으면서도 삶의 페이소스를 잃지 않는다. 근대 개화기를 내포한 무대 위에는 옛것과 새것이 뒤섞인 의상과 건축 양식이 공존하고, 해오름극장의 넓은 공간을 활용한 여백과 '사이'의 연기는 체호프 특유의 물밑 흐름을 무대 위에서 감각적으로 구현한다.

체호프는 갈등의 폭발을 무대 뒤에 숨기는 작가였다. '반야 아재'도 마찬가지다. 총을 겨눠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소동이 끝나면 남겨진 이들은 다시 묵묵히 삶을 이어간다. "어떡하겠어요. 살아야죠"라는 대사가 그 냉혹한 진실을 담담하게 전한다.

한바탕 폭풍처럼 휘몰아친 총격 소동이 끝난 후,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정미소에는 차갑고 냉혹한 진실만이 남는다.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장부를 정리하며 묵묵히 삶을 이어가야 하는 이보와 은희의 애잔한 뒷모습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한 짙은 페이소스를 남긴다.

개막 전 전석 매진을 기록한 이 작품에서, 조성하는 12년의 공백을 무대 위에서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지운다. 애처롭고 안쓰롭고 때로는 가소롭기도 한 이보를 통해, 그는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아재'를 꺼내 보인다.

공연은 5월 31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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