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도 이러지 않았는데, 일본을 건너 뛰다니….”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가 최근 한국과 대만을 잇달아 방문하면서도 일본은 찾지 않자, 현지 정보통신(IT) 업계에서 불안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일본 언론들은 이번 젠슨 황의 ‘재팬 패싱’이 단순한 일정상의 문제가 아니라 인공지능(AI) 혁명 과정에서 일본의 존재감이 약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라고 짚었다.
황 CEO는 최근 대만에서 TSMC와 폭스콘 등 핵심 협력사 최고경영자들과 연쇄 회동한 뒤 지난 5일 한국으로 이동해 SK그룹 최태원 회장, LG그룹 구광모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의장 등을 비롯한 주요 기업 총수들과 만나 AI 데이터센터와 차세대 AI 산업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일본 언론들은 황 CEO가 한국으로 이동하자마자 당일 밤 최 회장 등과 삼겹살에 소주를 나누며 친밀감을 과시했다고 전했다. 이후 닷새나 머무르며 인기 예능 프로그램 녹화에 참여하고 프로야구 경기 시구에 나서는 등 바쁜 일정을 소화한 점에도 주목했다. 일정을 쪼개서라도 한국 기업들과의 스킨십을 늘리려는 행보가 일본의 소외감을 더욱 자극한 것이다.
한국과 대만은 엔비디아 AI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국가다. 엔비디아는 반도체 생산을 TSMC에 의존하고 있으며, AI 반도체의 성능을 좌우하는 고대역폭메모리(HBM)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공급하고 있다. 반면 일본과의 협력은 후지쓰의 AI 반도체 개발, 화낙의 AI 로봇 프로젝트 등 일부 사례에 머물고 있다는 평가다.
일본 IT업계에서는 이번 재팬 패싱의 의미가 단순한 반도체 공급망 문제를 넘어선다고 보고 있다. 황 CEO가 최근 방문 국가들에서 강조한 것은 공급업체가 아닌 ‘AI 혁명의 공동 파트너’ 역할이기 때문이다.
과거 애플이 아이폰으로 스마트폰 혁명을 일으켰을 때 일본은 무라타제작소, TDK, 소니그룹, 키옥시아 등 부품·반도체 기업들이 애플 생태계에 편입되면서 새로운 성장 기회를 잡았다. 디지털 가전 경쟁에서는 밀렸지만 스마트폰 혁명의 파트너가 됨으로써 시대 변화에 올라탈 수 있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황 CEO가 시간을 쪼개 방문해 공동 혁신을 제안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기업이 지금 일본에 얼마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며 “미국 AI 기업인 앤트로픽과 팔란티어가 잇달아 일본을 찾았지만, 일본을 AI 개발 파트너라기보다는 시스템 판매 대상인 고객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에서는 미국 IT 서비스에 지출하는 비용 증가로 ‘디지털 적자’가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2025년 4월, 디지털 적자가 2035년 18조 엔까지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닛케이는 “AI 혁명 시대에 일본이 엔비디아 같은 선도 기업의 단순 고객에 머물지 않고 진정한 파트너가 될 수 있을지 여부는 앞으로 일본의 국부를 좌우할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도쿄=최만수 특파원 bebo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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