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이 일자리를 대체할 것이란 전망 속에 '기본소득'이 다시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이재명 대통령뿐만 아니라 실리콘밸리 빅테크 수장들이 비슷한 시기에 약속이나 한 듯 같은 화두를 꺼내면서다. 오랫동안 비현실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의제가 'AI발 고용 충격'이라는 변수를 만나 글로벌 논의로 번지는 모습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태평양 건너에서도 비슷한 언급이 나왔다.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최고경영자(CEO)는 자신의 블로그에 공개한 정책 에세이에서 AI가 초고속 성장과 극심한 불평등이 동시에 굳어지는 경제를 만들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AI발 노동 수요 감소가 장기화할 경우 AI 기업 과세나 자본이득세 인상을 재원으로 한 보편적 기본소득까지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다만 임금보험, 고용 유지 세제 혜택 등으로 일자리 충격을 최대한 늦추는 게 우선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기본소득은 그래도 충격이 클 경우의 보완 장치라는 얘기다.
빅테크 수장들의 기본소득 언급은 처음이 아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지난 4월 X(옛 트위터)에 AI로 발생하는 실업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부가 지급하는 '보편적 고소득(universal high income)'이라고 적었다. 기본 생활비를 넘어 풍요로운 생활이 가능한 수준의 소득을 모두에게 보장하자는 개념으로, 머스크 CEO는 2016년부터 자동화에 따른 기본소득 도입 가능성을 거론해왔다. 딥러닝 기술의 창시자이자 'AI 대부'로 불리는 제프리 힌턴 토론토대 명예교수도 AI 확산에 따른 불평등 대처 방안으로 기본소득 도입을 권고한 바 있다.
이들의 공통된 출발점은 AI발 고용 충격이 과거 기술 변화와 다를 수 있다는 인식으로 풀이된다. 아모데이 CEO는 AI가 인간의 인지 능력 전반을 대체하는 기술인 만큼 노동시장 충격이 이전보다 크고 오래갈 수 있다고 봤다. 실제 미국에서는 빅테크를 중심으로 AI를 이유로 든 감원이 이어지면서 고용 불안이 커지는 분위기다. 최근 로이터·입소스 여론조사에서는 미국인의 절반 이상(53%)이 AI 확산으로 자신 또는 가족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기본소득이 현실적 대안인지를 두고서는 회의적 시각이 적지 않다. 막대한 재원을 어떻게 조달할지, 일하지 않아도 소득이 보장될 때 노동 유인이 유지될지가 대표적 쟁점이다. 학계에서는 현금 지급보다 재교육과 재숙련 지원이 더 현실적이라는 반론도 제기된다.실제 실험에서 한계가 일부 드러나기도 했다. 샘 올트먼 오픈AI CEO는 2020년 사재 1400만달러를 포함해 총 6000만달러(약 900억원)를 들여 미국 저소득층 1000명에게 3년간 매달 1000달러(약 151만원)를 지급하는 일종의 '기본소득 실험'을 후원했다. 수급자들 지출은 월평균 310달러 늘었지만 근로시간은 주당 1.3시간 줄었고, 건강 지표가 개선됐다는 직접적 근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기본소득 옹호론자였던 올트먼 CEO는 지난 4월 인터뷰에서 "보편적 기본소득을 예전만큼 강하게 믿지 않는다"며 "현금 지급만으로는 사회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하기 어렵다"고 했다. 대신 개인이 AI가 만드는 성장의 과실에 지분 형태로 참여하는 모델로 방향을 틀었다. 오픈AI가 지난 4월 정책 제안서에서 제시한 '공공자산펀드(public wealth fund)' 구상이 대표적이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AI 기업 지분 확보를 통한 이익 환원 방안을 검토하는 것도 이런 흐름과 맞닿아 있다.
다만 전문가들은 기본소득 논의의 방향성에는 공감하면서도, 한국의 단기 도입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AI 초과이익의 분배 논의는 자본주의 질서 유지를 위해 언젠가 마주할 시대적 과제인 것은 분명하다"면서도 "현재 한국의 재정 여건과 노동시장 구조를 감안하면 단기적으로 실현하기에는 제약과 리스크가 큰 장기 과제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글로벌 공통 조세 룰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이 선제적으로 AI 초과이익에 고율 과세를 하면 혁신 기업들이 세제 혜택이 큰 해외로 본사나 인프라를 옮기는 '탈한국' 유인이 커질 수 있다"며 "독자 행동은 국내 산업 경쟁력을 갉아먹는 '자책골'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기업의 초과이익은 경기와 기술 주기에 따라 크게 출렁이는데, 한번 시작하면 줄이기 어려운 복지 지출을 이런 들쭉날쭉한 재원에 기대는 것은 재정 건전성에도 부담"이라고 덧붙였다.
노동 전환 인프라 투자가 우선돼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한국 노동시장은 대기업·정규직과 중소기업·비정규직으로 이중 구조가 심한데, AI 도입으로 먼저 타격을 입는 쪽은 단순 사무직과 서비스직 노동자들"이라며 "소액의 기본소득은 당장의 생계유지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노동시장 이탈을 고착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현금성 지원보다 국내 노동자의 AI 재교육 시스템 강화에 정책 역량을 집중해야 할 때"라고 짚었다.
홍민성 한경닷컴 기자 msho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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