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를 마르크스는 이윤을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한 결과로 봤다. 그는 1만원짜리 물건엔 1만원어치 노동이 투입됐다고 생각했다. 그중 8000원만 노동자에게 임금으로 지급하고 2000원은 자본가가 가져가니 착취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재화와 서비스의 가치가 생산에 투입된 노동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는 노동가치설이다.
1870년대 한계효용이론이 이런 논리를 무너뜨렸다. 윌리엄 제번스 등 한계효용학파는 상품의 가치가 소비자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결정된다고 봤다. 소비자가 느끼는 효용의 크기가 가격을 결정할 뿐 생산에 얼마나 많은 노동이 투입됐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상품 가격과 노동량이 무관하다면 이윤이 노동 착취의 결과라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는 한계효용이론의 연장선에서 이윤이란 위험을 부담한 대가라고 설명했다. 기업가가 실패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했는데, 결과적으로 성공했을 때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 이윤이라는 얘기다. 조지프 슘페터는 이윤은 혁신의 대가라고 봤다.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거나 효율적인 생산 방법을 고안해낸 결과가 이윤이라는 것이다. 이즈리얼 커즈너는 이윤을 발견에 대한 보상으로 정의했다. 소비자의 욕구를 찾아내 효과적으로 충족시켰을 때 얻게 되는 것이 이윤이라는 설명이다.
이윤이 노동자를 착취한 대가라면 노동자에게 이윤을 나눠주는 것이 맞다. 하지만 소비자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혁신한 대가라면 이윤은 기업가와 주주에게 돌아가야 한다.
어떤 기준선을 정한다고 해도 문제가 남는다. 기업이 항상 이익을 내지는 않는다. 손실도 낸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의 적정 영업이익이 연 100조원인데, 작년에 50조원 적자를 내고 올해 150조원 흑자를 냈다고 하자. 이때 150조원에서 100조원을 뺀 50조원은 초과 이윤이라고 해야 할까, 작년의 손실을 메운 것이라고 해야 할까.
독점 기업의 이윤이나 지대를 초과 이윤으로 부르기도 한다. 지대란 공급이 제한된 생산 요소를 소유함으로써 얻는 이익을 말한다. 글로벌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반도체 기업의 이익을 독점 이익이나 지대라고 볼 수는 없다.
이윤의 또 한 가지 역할은 혁신을 촉진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과 기업이 경제 활동을 하는 것은 그 대가로 이윤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더 큰 이윤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과정에서 혁신이 일어나고 경제가 성장한다. 초과 이익 추구는 기업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초과 이윤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의 이익을 거둬간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신기술 투자와 신제품 개발에 나설 유인도 약해진다. 그런 사회에선 혁신도 성장도 사라진다.유승호 경제교육연구소 기자 ush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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