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승리를 한 번 더 거두면 우리는 완전히 망할 것이다.” 그리스 북서부 에페이로스 왕인 피로스가 로마를 격파한 뒤 남긴 유명한 말이다. 잘 알려진 대로 전투에서 이겼지만 얻은 것보다 손실이 더 크다는 ‘피로스의 승리’의 유래다. 전쟁 승리는 달콤한 과실만 남기지 않는다. 현격한 전력 차이로 완승하는 등 일부 사례를 제외하고 전쟁은 승전국, 패전국 모두에 막대한 피해를 안겼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경우 승전한 영국과 프랑스, 패배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모두 엄청난 후유증을 겪었다. 전사자는 독일 약 177만 명, 러시아 170만 명, 프랑스 140만 명, 오스트리아-헝가리 120만 명, 영국 100만 명(식민지 포함) 등 총 900만~1100만 명이다. 민간인 사망자는 700만~13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전쟁 총지출 규모는 당시 기준 영국 약 230억달러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38%, 프랑스는 200억달러(37%), 독일 197억달러(53%), 러시아 76억달러(33%), 오스트리아-헝가리 47억달러(25%), 미국 173억달러(14%) 등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협상국이 패전한 동맹국보다 훨씬 많았다.
남성 노동력 급감으로 인한 생산력 손실, 인프라 파괴, 무역 붕괴는 말할 것도 없고 금본위제 붕괴로 국제 통화 질서의 해체를 가져왔다. 전쟁 비용이 금 보유량을 초과해 통화량을 늘리거나 국채를 발행해 전비를 조달하면서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국가의 경제 통제력을 높여 자유주의 경제 질서를 파괴했다. 독일은 미국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영국과 프랑스 등에 전쟁 배상금을 지급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 돈으로 미국에 전쟁 부채를 상환하고, 미국은 이 돈을 다시 독일에 빌려주는 ‘부채의 순환구조’는 대공황 악화의 요인이 됐다. 1929년 월스트리트 붕괴 뒤 미국 금융사들이 대출 회수에 나서면서 유럽은 패닉에 빠졌다.
영국은 ‘승리한 패자’라는 전쟁 역설을 그대로 보여줬다. 옥스퍼드 등 명문대 출신 엘리트 계층 참전 장교의 약 25~30%가 전사했다. 차세대 전문직, 지도자의 손실로 정치적 활력과 인재 순환에 큰 차질을 불렀다는 분석이 있다. 군수산업을 최우선시하다 보니 면직물 등 주력 수출품 시장을 잃었다. 군함 건조에 치중하느라 상선 등 전후 해운·조선업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미국과 일본에 시장을 내줬다. 런던의 금융패권은 상실됐고 제국 쇠퇴의 길을 걸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는 군사기술의 도약과 인종 절멸 이데올로기, 군국주의 등이 결합하면서 인적, 물적 피해는 1차 대전에 비해 훨씬 컸다. 전 세계 군인·민간인 사망자는 당시 세계 인구의 3~4%에 해당하는 7000만~8500만 명에 이른다. 1944년 기준 전쟁 비용은 모두 약 1조달러, 현재 가치로 미국 GDP와 비슷한 규모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전쟁 주역 유럽은 무너지고 전후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브레턴우즈체제가 출범하는 등 미국 패권을 확고히 하는 국제질서가 구축됐다.
상상초월의 피해가 예상됨에도 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갔을까. 전쟁으로 기대되는 효용이 현상 유지 때보다 클 때 전쟁을 선택하는 ‘합리적 기대효용’은 종종 역설적 결과를 낳는다. 한 지도자의 광기, 돌발적 사건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복잡한 요인들이 얽혀 있다. 우선 주목되는 게 존 허츠가 고안한 ‘안보딜레마(Security Dilemma)’ 이론이다. 로버트 저비스는 이를 ‘공포의 나선 모델’로 체계화했다. 국제관계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전쟁 개념이다. 특정 집단이 무력을 키워나갈 때 다른 집단 또는 개인을 불안하게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무력을 더 쌓아나가게 한다. 이 과정에서 특정 집단의 안보 보장을 확보하는 게 아니라 모두를 불안케 하면서 더 치열한 경쟁을 낳는다.
구체적으로 A 국가가 방어적 차원의 군비를 증강하면 B 국가가 이를 공격적 의도로 오판하고 역시 군비 증강에 나선다. A는 B의 대응을 과잉 반응으로 판단해 추가로 군비를 증강한다. 이 과정에서 상호 불신이 깊어지고 긴장이 고조된다. 위기가 발생하면 협상보다 군사적 선택 쪽으로 이끌게 된다. 객관적 판단에 기초한 위협의 증가가 아니라 주관적으로 느끼는 위협 인식의 악화가 나선형이 되면서 충돌을 낳는다. ‘공포의 나선 모델’이다. 오인, 오판하게 하는 유형으로는 상대의 모든 행동을 적대적으로 판단하는 ‘확증편향’, 상대는 본질적으로 공격적이라고 인식하는 ‘귀인오류’, 상대의 과거 침략 행위를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는 ‘과거의 그림자’, 상대의 진짜 의도와 관계없이 자국의 인식대로 상대에 투영하는 ‘거울이미지’ 등이 있다.
이런 ‘안보딜레마’가 가장 심각한 수위에서 적용된 것이 1차 대전 직전 유럽이다. 1908년부터 전쟁이 발발한 1914년까지 유럽 강대국들의 국방비 지출은 50% 증가했다. 특히 독일은 1911년 8800만파운드에서 1913년 1억1899만파운드로 늘렸고 러시아는 같은 기간 7400만파운드에서 1억1100만파운드로 증가시켰다. 나쁜 적들보다 뒤처지는 데 대한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점점 정치인들과 장군들을 압박했다(마거릿 맥밀런 ‘평화를 끝낸 전쟁’). 영국을 따라잡으려는 독일의 전함 건조와 이에 대응해 해군력을 더 확충하는 영국의 끝없는 경쟁은 ‘공포의 나선 모델’의 전형적인 예다. 영국은 방어적으로 해군력을 강화하는데 독일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외무부 장관은 자국의 총동원령은 러시아의 동원령에 대한 방어적 조치라며 상호 중단을 제안했지만 불신이 깊어진 마당에 소용이 없었다. 군비 경쟁이 격화되면 군부 입김이 강해지고 외교적 협상과 문민통제 작동이 어려워지면서 대결로 치닫게 된다. 1차 대전 직전 각국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 외교 협상 노력도 했으나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안보딜레마’ 틀을 벗어나긴 어려웠다.
2차 대전을 앞두고 독일의 군비 증강에 맞서 영국과 프랑스, 소련 등이 뒤늦게 군비 경쟁에 뛰어든 것도 ‘공포의 나선’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2차 대전 직후 미국이 마셜 플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창설에 대해 소련이 위협으로 인식해 베를린 봉쇄, 핵실험, 바르사바조약기구 설립으로 대응한 것과 미국-소련 핵군비 경쟁도 마찬가지 차원에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마냥 ‘공포의 나선’이 모두 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억제의 역할도 한다. 핵 경쟁 과열로 인한 상호확증파괴(MAD)의 공포는 역설적으로 미·소 핵군축을 추동하기도 했다.
나선 모델의 한계는 상대가 방어적 행위자인지 공격형인지 사전에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히틀러에 대한 오판이다. 히틀러의 속임수 전략에 그를 방어자로 보고 영국 등이 유화책으로 받아들인 결과 재앙을 막지 못했다. 나선 모델을 끊는 방법으로 핫 라인 구축 등 상호 신뢰 확보를 위한 노력, 선(先) 긴장 완화 조치에 상대방이 호응하면 좀 더 진전된 조치로 나아가는 ‘점진적 상호 긴장 완화’, 방어 목적의 의도를 명확하게 상대에게 전달하는 ‘신호의 명확성’, 군비 통제 조약 같은 제도 확립 등이 있다. 전쟁 발발 원인 분석으로 ‘안보딜레마’ 이외 여럿 있다. (③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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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문
A 국가의 방어 차원 군비 증강에 B 국가는 공격적 의도로 오판하고 역시 군비 증강. A는 B의 대응을 과잉 반응으로 판단해 추가로 군비 증강. 상호 불신 깊어지고 긴장이 고조되면서 협상보다 군사적 선택 쪽으로 이끌어
홍영식 한국핵안보전략포럼 운영위원(전 한국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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