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26일, 제47차 아세안(ASEAN) 정상회의에서 동티모르 민주공화국이 11번째 회원국으로 공식 가입했다. 2002년 독립 이후 20여 년에 걸친 아세안 편입 과정이 마무리된 것이다. 그리고 올해 5월 필리핀 세부에서 열린 제48차 정상회의는 동티모르가 정회원 자격으로 참석한 첫 무대였다. “함께 우리의 미래를 항해하자(Navigating Our Future, Together)“라는 올해 의장국 필리핀의 슬로건은 이 신입 회원국의 처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문장이 됐다.동티모르의 독립사는 아세안 현대사에서 가장 아픈 페이지 가운데 하나다. 450여 년의 포르투갈 식민지배가 끝난 1975년 독립을 선언했지만, 열흘 만에 인도네시아가 무력으로 점령하면서 24년간의 강점이 이어졌다. 1999년 8월 유엔 감독 아래 실시된 주민투표에서 78.5%가 독립에 찬성하자, 이에 반발한 친인도네시아계 민병대의 학살과 방화로 약 5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유엔은 다국적군(INTERFET)과 유엔 동티모르 과도행정기구(UNTAET)를 파견해 사태를 수습했고, 2002년 5월 마침내 독립국가가 탄생했다.
이 과정에는 한국의 기여도 컸다. 김대중 정부는 1999년 9월 국회 동의를 거쳐 특전사 중심의 상록수부대 419명을 파병했다. 건군 이후 최초의 보병부대 해외 평화유지활동(PKO) 파병이었다. 1999년 10월부터 2003년 10월 철수까지 연인원 3328명이 로스팔로스와 오에쿠시 지역에서 치안 유지와 구호 활동을 수행했고, 주민들은 이들을 ’말라이 무띤(Malai Mutin·다국적군의 왕)’이라 부르며 깊은 신뢰를 보냈다. 도강 훈련 중 급류에 휩쓸려 순직한 장병 5명의 희생도 있었다. 동티모르의 아세안 가입이 한국에게도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이유다.
하지만 가입의 기쁨도 잠시,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인구 약 130만 명의 동티모르는 아세안에서 가장 작고 가난한 회원국이다. 경제의 버팀목이던 바유운단(Bayu-Undan) 가스전이 지난해 생산을 종료하면서 더 이상 실질적인 산유국이라 보기 어렵게 됐다. 이제는 과거 석유 수입으로 조성한 약 189억 달러 규모의 석유 기금(Petroleum Fund)을 재정에 투입해 국가를 운영하는 구조다. 국가 예산의 약 80%가 이 기금에 의존하고 있으며 국제통화기금(IMF)은 현재와 같은 재정 지출이 이어질 경우 2030년대 후반 기금이 고갈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26년 국가 예산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90%에 달하고 재정적자는 GDP의 절반을 웃도는 수준이다. 비석유 수출은 사실상 커피가 대부분인데 2025년 커피 수출액은 약 3580만 달러에 그쳤다.
당장의 경제적 계산만 놓고 보면 아세안이 얻을 것은 많지 않고, 지원해야 할 것은 훨씬 많은 나라다. 그런데도 아세안은 왜 이 최빈국을 신입 회원국으로 받아들였을까? 답은 아세안이 스스로를 어떤 공동체로 정의하는가에 있다. 아세안은 출범 이후 줄곧 ‘포용을 통한 안정’이라는 원칙에 따라 역내 통합을 추진해 왔다. 1990년대 말 베트남·라오스·미얀마·캄보디아를 받아들일 당시에도 회원국 간 발전 격차는 컸지만 아세안은 배제보다 통합을 선택했다. 동티모르의 가입은 이러한 통합 논리의 연장선이자 그 원칙이 21세기에도 유효한지를 시험하는 무대다. 아세안이 지난해 채택한 ‘아세안 공동체 비전 2045’ 역시 이러한 포용적 통합을 향후 20년의 핵심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동티모르 중앙은행은 올해 약 5%의 경제성장을 전망하고 있다. 호주와 체결한 해양 경계 및 수익배분 협정에 따라 지분 56.56%를 확보한 그레이터 선라이즈(Greater Sunrise) 가스전이 2030년 전후 생산에 들어갈 경우 새로운 수입원이 생길 가능성도 있다. 아세안이라는 거대한 단일 시장과 역내 관광시장에 편입되는 효과, 노동 이동과 송금 확대도 기대된다. 수도 딜리(Dili) 국제공항 확장과 해저 광케이블 연결 등 인프라 개선도 진행되고 있다. 아세안이라는 우산은 이 작은 나라에 시장과 신뢰, 그리고 협상력을 제공한다.
문제는 반대 방향의 가능성이다. 호주 로위연구소(The Lowy Institute)가 지적했듯이 대외 충격에 취약한 소규모 경제가 흔들릴 경우 그 불안정은 이주 압력과 초국가 범죄 등 역내 전체의 부담으로 번질 수 있다. 재정절벽이 현실화할 경우 동티모르는 아세안 최초의 ‘역내 지원 대상국’이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아세안에는 유럽연합(EU)과 같은 결속 기금도, 상설 재정지원 메커니즘도 없다. 11번째 별을 달아주는 것으로 통합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통합이 실제로 작동하는지를 증명해야 할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파푸아뉴기니가 가입을 추진하고 피지와 방글라데시가 옵서버 지위를 모색하는 상황에서 동티모르의 성패는 아세안 확장 모델 전체의 중요한 선례가 될 것이다.
한국의 역할도 중요하다. 27년 전 총을 들고 이 나라의 탄생을 지켰던 한국은 이제 동티모르의 아세안 연착륙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커피를 비롯한 교역 확대, 디지털 인프라 구축, 공무원 역량 강화 등은 한국의 공적개발원조(ODA)가 비교우위를 가진 분야다. 무엇보다 상록수부대가 남긴 신뢰라는 외교적 자산은 다른 나라가 쉽게 갖기 어려운 한국만의 자산이다. 동티모르는 작은 시장이지만, 아세안이 앞으로도 포용과 확장을 이어갈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시험대이기도 하다. 한국이 동티모르의 안정적인 정착을 돕는 일은 단순히 작은 나라 하나를 지원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한국의 중요한 최대 협력 파트너로 성장한 아세안이 앞으로도 하나의 공동체로 안정적으로 작동하도록 투자하는 일이다. 27년 전 평화를 위해 함께했던 나라와 이제는 성장의 동반자가 되는 것, 그것이 한국의 새로운 아세안 전략이 될 수 있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이성득 인도네시아 UNAS경영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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